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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대덕산에서 빼재까지 2003. 7. 27
2004년 02월 26일 (목) 00:00:00 차은량 cel305@dreamwiz.com

   
몇 번인가 잠을 설치다 시간을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사위는 분간이 안되게 어두운데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진행팀의 어제 얘기론 폐허의 주유소건물을 오른쪽으로 돌아 숲으로 이어진 소로 끝에 간이화장실을 만들어 놓았고 벌통이 있지만 벌을 건들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했다.
랜턴을 비추니 아닌게 아니라 양쪽으로 벌통이 백여 개는 넘을 것 같은데 그 끝에 화장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숨을 죽인 채 벌통 몇 개를 지났나 싶은데 더 이상은 발이 움직이질 않는다.
돌아보니 그새 꽤 깊숙이도 들어왔다. 내가 정신이 나갔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뒷덜미가 오싹해져서 벌벌 떨며 텐트로 돌아왔다. 참자. 참아서 남 주나.

지루한 속에 간신히 날이 밝았다.  하루 일과 중에 아침시간이 제일 바쁘다.  눈치껏 고양이 세수를 하고 소금으로 이를 닦은 후 보급대 차량에 실을 슬리핑백과 매트리스, 큰 배낭과 메고 갈 작은 배낭을 꾸려 텐트 밖으로 내 놓고 모두 식사준비를 한다.

한 사람은 보급대에 가서 간식을 배급받아 챙기고 한 사람은 주먹밥을 만들고 나는 미숫가루 당번을 맡았다. 사진팀 전원 각자의 물병에 미숫가루를 타서 한 병씩 나누어주고 나니 이화백님과 홍선생은 벌써 식사준비가 끝나있다.  오늘 아침은 북어국이다.  한 쪽 버너에 커피 물을 올려놓고 밥을 먹기 시작하면 커피 물이 끓는 것과 동시에 식사가 끝난다.
밥그릇을 휴지(두루마리 화장지 세 칸이 권장량이지만 실제론 그 이상을 쓴다)로 닦아 거기에 커피를 따라 마시고 다시 휴지로 닦는다.

   
▲ ⓒ 2003 차은량

그런 휴지들을 모아 숭늉을 끓여낸 큰 코펠과 국을 끓인 코펠을 닦는다.
환경을 해롭게 하는 설거지는 못하게 되어 있다.  마른반찬은 그대로 플라스틱 뚜껑만 닫으면 된다.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설거지가 끝나면 텐트를 걷고 조별로 나누어 준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에 남은 부식과 취사도구를 챙겨 넣어 트럭 앞에 갖다 놓으면 산행준비 완료. 삼각대는 포기하자.  짐이 무거워 산행에 지장을 초래한다면 삼각대가 무슨 소용이랴.

 진행팀의 구호에 조별로 줄 맞추어 서서 산행준비에 대한 점검을 하고 맨손체조를 하며 몸을 푼다.  오늘도 급하게 치고 올라가는 곳이 몇 군데 있다는 설명을 벌써 몸이 알아듣고 바짝 긴장이 되었다. 대열은 1291M 대덕산 정상을 향해 숨가쁘게 오르고 산 위에선 식물도감에서나 보던 반가운 꽃들이 산 아래로 물밀 듯 내려 올 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급경사나 피해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접고 산을 오르는데 제법 옷을 적시는 비가 내렸다.  암벽을 타는 것도 아니어서 이 정도의 비라면 해가 떠서 더운 날보다 산행하기엔 좋다.  선두로 출발한 일행 몇이 진행팀의 인솔로 되돌아와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물통을 안 가지고 와서 하산 조치를 받았단다.

산중에 흔한 것도 물이지만 또 귀한 것도 물이거늘. 그러다 낙오라도 하여 노숙을 하게 되면 어찌했을까. 백두대간은 우리 국토의 등뼈에 해당하는 능선을 타는 것이기 때문에 물을 만나기가 거의 어렵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그래서 생긴 말이다.

경사가 좀 완만해져서 카메라를 꺼내 몇 컷 접사를 하였다.
어느새 대열은 보이지 않고 후미를 맡은 성민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픈 배를 움켜쥐며 죽어라고 걸었던 작년 강원도 탐사. 지독한 역마살이었다.
어느 사이트에선가 전생을 찾아보니 내가 꽤 열정적인 집시였다고.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응종씨가 끓여주는 죽도 소화를 못 시켜 사흘을 내리 굶고 태백에 내려가 주사를 맞으면서도 끝내 구간종주를 마쳤으니. 이화백님과 동해백두대간의 김원기회장님이 번번이 뒤로 처지는 나를 선두에 세워 주시고 각별히 격려해주지 않았으면 중간에 포기하고 산을 내려왔을 것이다.
혼자 하는 산행도 아니고 대열을 이루는 산행에선 뒤로 처지게 되면 정작 본인이 힘든 것보다 후미를 맡아 대열을 챙기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고역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밀집한 산죽과 미역줄기덩굴이 앞으로 나가는 발길을 사정없이 가로막는다.
어느 새 눈앞엔 작은 삼도봉 정상의 표지석이 서 있고 비 그친 후 안개 속에 옅은 햇살이 곱다.
앞으로, 뒤로 첩첩이 산중이요, 또 구름이 첩첩이다. 나는 왜 산에 왔을까.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
무슨 깨달음을 얻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거창한 명제 앞에선 할 말을 잃는다.
나는 다만 걷고 싶었을 뿐이다. 하늘을 이고 바람을 벗삼아 구름을 벗삼아 나무와 꽃들과 오래된 이끼의 냄새.
그런 속에서 언제까지나 터벅터벅 걸어보고 싶었다.
산에 오른 내 이유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었다.

   
▲ ⓒ 2003 차은량

떠나기 며칠 전 마음을 다친 일이 있었다.
마른 불같은 내 성격이 웬일로 침착해져서 조용히 혼자 삭히던 중에 산행이 시작되었고 자칫하면 열흘 산행이 마음을 들볶는 고행이 될 뻔 하였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무어 있으랴. 꽃은 피었다 지고 바람불어 구름 흐르고 사람은 왔다가 가는 것.

여러 날 산행을 하다보면 둘째 날이 가장 힘들다.
더욱이 이번 구간은 다른 구간보다 마룻금의 편차가 심해서 급한 오름을 몇 번인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느라 모두들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친구가 행여 뒤쳐져 기운을 잃을까 걱정하고 있는 내 마음을 알고 있는 듯 앞서 걷고 있는 렘은 오르는 일에만 몰두하는지 일체 말이 없다.
이번 산행을 대비해 근 이십여 일을 무거운 배낭을 지고 자전거로 도보로 혹독한 트레이닝을 하고 왔다지만 기껏해야 소풍 같은 등산 몇 번의 경험으로 구간완주를 할 수 있을까….
암만해도 무리라는 생각에 나는 속으로 중간에 렘을 내려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산에서의 점심식사는 언제나 즐겁다.
소금과 참기름, 구운 김가루로 버무린 주먹밥에 장아찌를 반찬 삼아 먹는데 잔칫집 분위기가 따로 없다.
우리끼리의 표현으로 산에서 마시는 술을 '일급수'라는 은어를 쓰는데 산에선 일급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단연 최고의 권력을 행사한다.
평탄한 산행에서의 얘기다. 고된 산행에 술까지 지고 오는 사람 앞에 어찌 머리를 조아리지 않으리. 이화백님 배낭엔 1.8리터들이 일급수가 결코 빠지는 법이 없다.
렘과 나에겐 커피가 일급수인데 아직 임꺽정(김응종)이 합류하지 않은 사진팀에 버너와 커피를 준비할 용사는 없으니 임꺽정이 합류할 날만 고대하며 참는 수밖에.

산죽과 미역줄기 넝쿨들로 지루한 능선을 벗어나자 깎아지른 산등성이가 그대로 휩쓸려나간 듯 벌건 토사가 드러난 골짜기가 나타났다.
돌을 캐내던 폐광지역이었다. 산 아래로는 고랭지채소밭이 광야처럼 펼쳐져 있다.
산에 있는 자원을 캐낸 후 원상복구야 어렵겠지만 일체의 노력도 없이 방치되어 있는 모습은 무책임을 벗어나 자연과 후손을 생각지 않는 범죄자의 몰염치한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크게는 인류의 편리한 문화생활을 위해, 작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산을 허물고 바다를 메우는 사람들.
꽃 한 송이, 나뭇잎 하나 만들어 낼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손길이 이렇듯 파괴를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 황폐한 모래땅 위에 무언가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어 카메라부터 들이대고 보니 정교하게 꼬인 줄기에 진한 분홍빛 작은 꽃을 피우고 있는 타래난초였다.
타래난초는 엉성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꽃 이름도 처음 듣거니와 '난초'라는 말에 우리 꽃인 줄 알고 기뻐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귀화식물이라는 것이다.

꽃 사진을 찍게 되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대개의 귀화식물은 기존의 토종식물과의 평화로운 공생보다는 무차별 제 영역을 넓혀 가는 것에 문제가 있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식이다.
꽃은 다 예쁘고 이 땅에 피어 준 것이 고마워야 할 것인데 나중에라도 남의 나라에서 온 꽃인지 알고 나면 왜 그렇게 정답지가 않은 지 모르겠다.

참으로 길고 지루한 구간, 빗방울을 보석처럼 매달고 있는 보랏빛 일월비비추가 벗해주지 않았으면 산행이 고행이 될 뻔한 여정이었다.
오늘의 야영장은 덕유산군의 빼재주차장이다. 빼재야영지는 훌륭했다.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휴게소가 있었고 너른 광장 반대편의 폐점한 주유소 마당은 깨끗했다.
그곳에 텐트를 쳤다. 휴게소 여주인의 거절로 샤워는 못했지만 그 비슷한 걸 하고 빨래도 몇 가지 빨아 널 수 있었다. 밤늦게 사진팀의 정예멤버인 윤태동씨가 합류했고 렘과 나에겐 태동씨로 인한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룻금- 봉우리와 봉우리를 있는 능선의 지도상 표기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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