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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회관, 결국 주차빌딩 되다
한국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얽힌 근대사의 굴곡
2004년 02월 19일 (목) 00:00:00 오마이뉴스 webmaster@ohmynews.com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내려 명동의 번화가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한국외환은행의 본점이 있다. 그 뒤편에는 제법 널찍한 공간이 나오고, 거기에서 다시 아담한 크기의 동상 하나를 만난다. 주변이 그다지 북적이지도 않고 마침 동상도 서 있고 하니, 행여 약속장소로 삼기에는 마침맞은 곳이 아닌가 싶다.

동상의 주인공이 누군가 했더니, 일제강점기 때 대표적인 경제수탈기구였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다 폭탄을 던지고 또 총격을 가한 뒤에 자결했던 나석주 열사였다. 이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진 것이 1999년 11월이었으니, 1928년 12월의 의거 이후 무려 70여년을 넘기고서야 겨우 그만한 흔적 하나를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 한국외환은행의 본점 주변에는 제법 많은 기념표석이 흩어져 있다. 서울특별시가 차례대로 '장악원터'(86년 8월), '제중원터'(90년 10월), '나석주의사 의거기념터'(94년 7월) 표지석을 설치하였고, 나석주 열사의 동상은 1999년 11월에 따로 건립되었다.
ⓒ2004 이순우
그러고 보니 외환은행 건물의 서편 출입구 앞쪽에도 '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터'라고 새긴 기념표석이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이 표지석은 지난 1994년 7월에 서울특별시가 세워놓은 것인데, 그러니까 여기가 바로 그놈의 '동척'이 있던 자리가 확실하긴 확실한가 보다. 나중에는 비록 동양척식의 본점이었다가 경성 지점으로 강등(?)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약간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외환은행 본점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념 표석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서울 시내를 통틀어 이곳처럼 표지석이 많이 몰려있는 곳이 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가 그만큼 역사의 굴곡이 혼재된 장소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은행 앞쪽의 북서 모서리에는 '장악원(掌樂院) 터'라고 새긴 것이, 그리고 다시 뒤편의 남서 모서리에는 '제중원(濟衆院) 터'라고 적어 놓은 표지석이 각각 보인다. 말하자면 동양척식이 있던 자리는 그 이전에 장악원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또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 기관이었던 제중원도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겉으로만 드러난 역사가 적어도 이러하다는 것인데, 알고 보면 이 장소에 얽혀있는 '덜 알려진' 역사는 이것 말고도 수두룩하다.

다만 이 대목에서 한가지 사실만은 미리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지금에야 거대한 외환은행의 본점 건물이 지어지면서 하나의 지번으로 묶여 있지만, 여기가 원래는 크게 구분되는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해 은행의 전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서쪽) 절반은 동양척식이 있던 자리이고, 왼쪽(동쪽) 절반은 제중원이 있던 자리였다. 그러던 것이 두 구역에 걸쳐 외환은행 본점 건물이 지어졌고, 지번 역시 원래는 각각 을지로 2가 195번지와 193번지였던 것이 하나로 합쳐져 지금은 이 일대가 모두 을지로 2가 181번지로 통합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 <경성안내>에 소개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전경이다. 오른쪽의 <경성부명세신지도>(1914년)에는 동양척식과 더불어 '귀족회관' 자리가 나란히 표시된 모습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한국외환은행 본점 건물은 이 두 구역을 합친 터전에다 세워 올린 것이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이곳이 제중원이었다는 표지석은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편 쪽으로 옮겨서 재배치하는 것이 옳다. 동양척식이 있던 곳에 무심코 제중원의 표지를 남겨둔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는 소리이다.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자꾸 뒤적인다는 것이 그다지 달가운 일은 전혀 아니긴 한데, 그렇더라도 흥미로운 구석이 전혀 없지는 않다. 특히 제중원이 있던 을지로 2가 193번지 구역의 그것을 추적하다보면, 그런 생각은 절로 든다. 이곳은 과연 어떠한 굴곡의 역사를 지닌 것일까?

관련 자료를 뒤져 보니, 원래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홍영식의 재동 집터에 세워졌던 제중원이 구리개 즉 지금의 을지로 2가로 옮겨온 것이 1887년의 일이었다. 그러다가 남대문 밖의 복숭아골에 세브란스병원을 따로 지어 그곳으로 다시 옮겨간 때가 1904년이었다.

그 바람에 제중원 터는 이듬해에 한국 정부로 반환되었고, 그 와중에 대동구락부가 이곳을 차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동구락부는 또 뭔가 했더니, 1904년 9월 무렵에 일본공사관의 서기관 하기하라 모리카즈(萩原守一)가 발기하여 조직했던 한일관민(韓日官民)의 친목단체라고 한다.

그리고 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이 이 단체의 총재로 추대되었다고 적어놓은 기록이 보인다. 그 시절 행세깨나 했던 고관들이 두루 참여했고 또 고종황제가 하사금까지 내린 탓인지, 한때 이 단체의 위세는 상당한 지경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때마침 한국 정부로 반환되는 제중원 터를 대동구락부가 손쉽게 접수했던 것도 그러한 배경이 작용했던 결과였을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하기하라 서기관이 직접 개입했던 흔적이 적지 않게 발견되는데, 여하튼 그 결과에 대해서는 <황성신문> 1905년 4월 26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남아 있어 참고할 만하다.

"제중원을 아정(我廷)에서 3만 5천원에 매수하여 이층 양옥은 외부 고문관 수지분(須知分)씨의 관사로 정하고, 기여(其餘)는 대동구락부로 의정하고 방금 수리하는데 역비(役費) 3천여원을 탁지(度支)에서 지출한다더라."

여기에 나오는 '수지분'은 1904년에 외교고문으로 기용되었다가 1908년 전명운, 장인환 지사의 손에 절명한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를 가리킨다. 그런데 제중원 터를 취득한 대동구락부는 얼마나 그 재력이 막강했던지 새로운 건물을 다 짓고도 돈이 남아돌아 회원들에게 조금씩 돈을 갈라줬다는 기사도 보인다. 실제로 <만세보> 1906년 10월 31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대동구락부는 2만 8천원을 비용(費用)하여 동현(銅峴)에 신축하고 그 설비 장식 등에 경(更)히 1만원을 요구되었는데, 해(諧) 구락부의 자금은 목하(目下) 5천원이 잉존(剩存)함으로써 금회 각 회원에게 10원 이상씩 기부하기를 발기하여... (하략)"

   
▲ 1907년 가을에 동현(銅峴) 즉 구리개에서 개최된 경성박람회의 모습이다. 제중원이 있던 곳에 대동구락부가 들어섰고, 다시 그 자리에서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잠깐 농상공부가 들어섰다가 1912년에는 마침내 조선귀족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 <매일신보 > 1912년 5월 4일자에 소개된 조선귀족회관의 모습이다. 경성박람회 때의 사진에 등장하는 건물이 바로 가운데에 있는 높은 건물이다. 그런데 대문기둥에 여전히 '농상공부(農商工部)'라는 간판이 남아있는 걸로 봐서, 이 사진은 적어도 1910년 이전에 촬영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2004 이순우
그러다가 이 자리가 다시 세상의 주목을 크게 받은 것은 이른바 경성박람회 때였다. 1907년 가을에 대동구락부 건물을 본관으로 삼고 그 뒤편의 언덕 일대를 전부 진열 공간으로 삼아 개최했던 이 박람회는 때마침 일본 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했던 시기와 겹쳐 일본인들이 꽤나 흥청거렸던 행사였다.

그런데 흔히 이때의 경성박람회를 일컬어 우리 나라 최초의 박람회라고 잘못 소개하는 자료들이 자주 보이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확인해 보았더니 이에 앞서 기차박람회(汽車博覽會)라는 것도 있었고, 특히 1906년 5월 16일에 한일박람회(또는 부산박람회)가 개최된 기록이 분명히 남아 있었다. 따라서 경성박람회를 우리 나라 최초의 박람회라고 하기는 어렵겠고, 단지 서울 지역에서 개최된 최초의 박람회였다는 정도로 정리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한 경성박람회가 종료된 뒤에는 엉뚱하게도 박람회를 주관했던 농상공부가 직접 이곳으로 청사를 옮겨왔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망국의 관공서가 구태여 이곳까지 옮겨온 까닭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이 건물은 한일합병 이후에 조선귀족회관으로 변모되는 과정을 거친다.

말하자면 제중원이 물러난 자리는 어느새 친일 귀족의 소굴이 되었다는 얘기이다. 회장에는 박영효 후작이, 그리고 민영휘 자작이 부회장을 맡았던 조선귀족회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12년 1월 22일의 일이었다.

   
▲ 조선귀족회의 발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12년 1월 23일자이다. 지면의 하단부에는 "때마침 천황폐하께옵서 청주(淸酒) 한동이를 하사하신 고로... 일동이 무불 감격하였다더라"고 적어놓은 내용이 들어 있다. 이른바 조선귀족들의 작태는 대개 그러한 것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자신들을 귀족으로 지명한 천황의 은덕에 감읍하고 또 그들만의 복리후생을 꾀하는 것이었을 테지만, 그래도 귀족의 신분에 어울리는 번듯한 공간이 필요했던 것인지 새집이나 다를 바 없었던 예전의 대동구락부를 지목해 그곳을 차지하게 된다.

우연찮게도 이 과정에 대해서는 이완용의 행적을 정리한 <일당기사(一堂紀事)>(1927)에 그 일단이 보인다.

"(1911년) 8월 9일 조선귀족회 설립을 위해 대동구락부에 가다. ... 회관의 가사(家舍)는 대동구락부를 인계하는지라 그 변상을 5천원으로 하며, 기타의 설비비는 5천 원 이상 8천원 이내로 개산(槪算)하여 합계 1만여원은 각 귀족의 소득, 공채액수에 의해 징수하기로 결정했고, 회관의 기본금은 거액에 달하여...(하략)"

종종 이곳에 모여 형편이 어려운 귀족들의 처지를 돕기 위해 성금을 갹출하거나 이들을 구제하는 차원에서 역둔토(驛屯土)를 불하해 달라고 총독에게 상신하는 내용의 모임을 열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귀족회관이란 것이 애당초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는 도무지 짐작할 도리가 없다.

흔히 조선 귀족들이 중용되던 중추원에서조차 툭하면 화투판이 벌어지기 일쑤였다는 신문 기사가 자주 등장함을 비쳐 본다면, 귀족회관에 모여든 그네들이 무엇으로 소일했을 것인지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더구나 도박이나 마약에 빠져 은사금(恩賜金)을 탕진하고 파산 상태에 들어가는 불우 귀족들(?)도 적지 않았다니, 그러한 작태가 더없이 한심하게만 느껴질 따름이다.

나라를 저버리고 일신의 영달에나 몸부림쳤을 조선 귀족들의 사랑방 정도로나 사용되었을 법한 이 귀족회관은 언제까지 존속했던 것일까? 이에 관한 세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어 단정하기가 어렵지만, 1920년대 후반기까지는 을지로 2가쪽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1927년에 발행된 <경성시가도>에는 귀족회관의 위치가 표시된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직후 <조선> 1930년 9월호에는 제중원이 있던 이곳을 '황금정 이정목 타카이병원(黃金町 二丁目 高井病院)'이라고 소개한 글이 등장하는 걸로 미뤄보면, 아마도 그 즈음에 귀족회관은 벌써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의 흔적을 추적하지는 못했다.

   
▲ 을지로 2가에 있는 외환은행 본점의 왼쪽 절반은 원래 제중원이 있던 자리이자 한때 조선귀족들의 소굴이 자리했던 곳이었다. 외환은행이 이곳에 본점 건물을 신축이전한 것은 1981년 1월 30일이고, 그 옆에 보이는 주차빌딩(밝은 색의 폭이 좁은 건물)은 1990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니까 귀족회관은 결국 주차빌딩이 되었던 것이다.
ⓒ2004 이순우
토지대장을 확인해 보았더니, 귀족회관이 있던 을지로 2가 193번지는 해방 이후 귀속 재산이 되었다가 민간 기업에 불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상당 시간이 흐른 1978년 무렵에 한국외환은행이 본점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그 옆에 있던 동양척식 자리 즉 을지로 2가 195번지와 더불어 이 땅을 취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미 거대한 본점 건물이 들어선 지 오래인지라 그 주위에 늘어선 서너 개의 기념 표지석을 제외한다면, 그 시절의 흔적을 더듬어볼 만한 건더기는 아쉽게도 전혀 없는 셈이다.

상황이 이러한 판국이다 보니 이곳에 동양척식회사가 있었다는 것도, 제중원이 있었다는 것도, 스티븐스의 관사가 있었다는 것도, 시끌벅적한 경성박람회가 열렸다는 것도, 농상공부가 들어섰다는 것도, 대동구락부가 있었다는 것도, 광산기사 코지베 박사의 관사가 있었다는 것도, 일제 말기에는 타카이의원이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신한공사(新韓公司)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일이 다 기억하기는 정녕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행여 이 앞을 지나치거들랑 이것 하나 정도는 제대로 새겨두는 것이 좋겠다. 지금은 주차 빌딩이 치솟아 있는 바로 저곳에 참으로 한심했던 조선 귀족들의 소굴이 있었노라고 말이다.

'짓고땡'에 빠져든 조선귀족 이지용(李址鎔) 백작

   
▲ 을사오적 중 1인 백작 이지용
ⓒ병합기념조선사진첩
조선귀족회가 구리개의 대동구락부 자리를 인수하여 조선귀족회관으로 삼고, 1912년 1월 22일자로 공식 발회식을 진행하던 바로 그 즈음에 엉뚱하게도 도박범으로 검거되어 조선 귀족의 품위를 한껏 떨어뜨린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을사오적(乙巳五賦)의 하나였던 이지용이었다.

그가 빠져든 도박은 '지여땅이' 즉 '짓고땡'이었다. 그 시절의 신문 기사에는 재판 과정에 대해 비교적 소상한 내역을 담고 있어 그의 행적을 뒤져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어쨌거나 결국 그에게 내려진 판결 언도는 곤장 100대였다.

실제로 그가 이러한 처벌을 직접 받았는지 아니면 종친(宗親)의 위세를 빌려 어찌어찌 처벌을 모면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한합병에 기여한 지대한 공로로 그 자신이 수여받은 '백작(伯爵)'의 예우는 1912년 4월 9일부로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1915년 9월에 가서야 겨우 복작되는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매일신보> 1927년 4월 24일자에 보면 이지용의 실제(實弟)라는 이범구(李範九)의 행적에 관한 내용이 하나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기사의 제목은 '이백작의 실제, 아편 빨다 피착(被捉), 구한국시대의 궁내차관, 지금은 아편장이의 신세'라고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떠한 세상의 고민이 그들을 도박과 아편에 빠져들게 만든 것일까? / 이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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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환은행의 본점 주변에는 제법 많은 기념표석이 흩어져 있다. 서울특별시가 차례대로 '장악원터'(86년 8월), '제중원터'(90년 10월), '나석주의사 의거기념터'(94년 7월) 표지석을 설치하였고, 나석주 열사의 동상은 1999년 11월에 따로 건립되었다.
ⓒ2004 이순우

<경성안내>에 소개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전경이다. 오른쪽의 <경성부명세신지도>(1914년)에는 동양척식과 더불어 '귀족회관' 자리가 나란히 표시된 모습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한국외환은행 본점 건물은 이 두 구역을 합친 터전에다 세워 올린 것이다.

1907년 가을에 동현(銅峴) 즉 구리개에서 개최된 경성박람회의 모습이다. 제중원이 있던 곳에 대동구락부가 들어섰고, 다시 그 자리에서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잠깐 농상공부가 들어섰다가 1912년에는 마침내 조선귀족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매일신보> 1912년 5월 4일자에 소개된 조선귀족회관의 모습이다. 경성박람회 때의 사진에 등장하는 건물이 바로 가운데에 있는 높은 건물이다. 그런데 대문기둥에 여전히 '농상공부(農商工部)'라는 간판이 남아있는 걸로 봐서, 이 사진은 적어도 1910년 이전에 촬영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귀족회의 발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12년 1월 23일자이다. 지면의 하단부에는 "때마침 천황폐하께옵서 청주(淸酒) 한동이를 하사하신 고로... 일동이 무불 감격하였다더라"고 적어놓은 내용이 들어 있다. 이른바 조선귀족들의 작태는 대개 그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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