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로 전근해 온 후 처음으로 맞는 졸업식이었습니다. 종교재단이니 만큼 졸업 미사 형식을 빌어 진행되었습니다. 비록 졸업식을 겸한 엄숙하고 경건한 전례였지만, 왁자지껄한 중학생들의 정서(?)를 비껴갈 수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미사가 주는 이미지로 인해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졸업 미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삽입된 전통적인(?) 졸업 의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성적과 근태에 관한 시상식, 교장 선생님의 '회고사', 재학생 대표의 '송사', 졸업생 대표의 '답사', 그리고 '스승의 노래', 그 순서와 내용까지도….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졸업의 기쁨과 아쉬움이 담겨진 졸업생의 -탄식이나 눈물은커녕- 표정도, 선배를 떠나 보내는 재학생의 안타까워하는 모습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졸업생이든 재학생이든, 졸업식은 여느 행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과정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졸업생 중 두어 명은 상장을 받기 위해 단상에 서너 번씩 오르락내리락 하고, 시상식을 지켜보는 아이들-졸업생이든 재학생이든-은 시큰둥한 채 하릴없는 박수만 쳐 댑니다. 그 박수 소리에는 부러워한다거나 축하한다거나 하는 진심(?)은 담겨져 있지 않은 듯했습니다. 사회를 맡아보는 선생님의 '부탁'에 이끌려 하는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하긴 그조차도 하지 않고 멍하니 고개를 떨구고 있는 학생이 더 많았습니다.

상장을 받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지만, 상장의 종류는 참 많았습니다. 개근상이나 정근상 수상자 몇 십 명을 제외하면, 모두 다 성적에 관한 상이었고, 이들의 수상자는 200명 가까운 졸업생 중 몇 명에 한정되었습니다. 수많은 구경꾼(?)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잠자코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수상할 때의 빳빳한 상장들은 행사가 끝나고 모인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건네진 직후 졸업생들의 좁은 주머니 속에 들어간 채 꼬깃꼬깃 구겨지고 맙니다.

특히 졸업장과 개근상, 정근상 따위는 -거칠게 표현하자면- 휴지 조각과도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교실 바닥에 누구에겐가 밟혀 뒹굴고 있는 졸업장과 심지어 교실 폐지함에 담겨져 있는 정근상장도 보았습니다. 이미 그것들은 상장이 아니었습니다. 상장이 주는 그 어떠한 느낌도 담기지 않은, 그저 두꺼운 종이일 뿐입니다.

주변에서 흔히 이야기하듯, 상장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육적으로 주면 줄수록, 받으면 받을수록 효과적인 '기법'이 상장이라지만, 그로 인해 어떠한 감동도 줄 수 없다면 자원 낭비(?) 차원을 넘어서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상장이 특정한-사실상 성적이 우수한- 몇몇 학생들에게 집중되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적이 우수하다는 것과 체력이 강하다는 것, 성실하고 부지런하다는 것 등이 -최소한- 동등하게 비교되고, 남발되는(?) 상장이 그에 맞게 다양하게 시상되어 많은 학생들이 시상대에 오를 수 있어야 옳지, 몇몇 사람이 성적 하나로 독식하는 모습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20년 전의 상장을 꺼내 보았습니다. 지금의 그것과 형식은 물론 적혀있는 글귀조차도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하여…'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테지만, 성적이 우수하면 -일단- 품행이 방정하다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보는 상장의 규정이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데에 놀랐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학교 현장에서는 학업 성적이 좋지 않으면 '품행이 방정하다'는, 상장을 통한 공식적인 칭찬은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긴 상장에 적힌 내용을 한 번이라도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어 이미 사문화된 글귀이기는 합니다만….

미사의 형식을 빈 졸업식이긴 했지만, 수백 명의 학생들은 행사를 관람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지루해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행사의 준비 단계부터 진행과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선생님들에 의해 꾸려졌기 때문입니다.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만감이 교차하는' 졸업식이지만, 하나의 축제일 수는 없을까 하는.… 그러자면, 비록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는 겨울방학 기간이지만, 얼마간 짬을 내어 졸업하는 선배들을 위해 1년 후배들-곧, 2학년-이 나름대로 졸업식을 준비하면 훨씬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해 왔던 관례나 형식을 깨뜨려서라도 졸업이라는 의미에 충실하고 톡톡 튀는 10대들의 아이디어를 발휘해 본다면 또 하나의 축제의 장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겨울방학 기간인지라 졸업하는 선배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겠다는 후배들이 몇이나 될까 싶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를 공유하고 학교와 선생님들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만 된다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습니다.

졸업식 말미에 재학생 대표가 읽는 '송사'의 내용 중 빠지지 않는 글귀가 있습니다.

'선배들이 베풀어주신 사랑을 잊지 않고….'

물론 지극히 형식적인 발언임을 알지만, 후배들이 선배들을 위해 직접 준비하고 진행하는 졸업식이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진다면, 선후배들의 정이 끈끈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20년 동안이나, 아니 이보다 더 오래 지속될지도 모르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이어져 온 관례이지만, 하루아침에 깨질 수 있는 유연한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졸업식이 끝났습니다. 졸업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요즘의 날씨처럼 허무해지게 된다지만, 저를 더욱 착잡하게 만드는 것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는 장면을 또 보게 되었다는 점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