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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사발은 왜 조선의 제기인가?
일본은 우리의 옛사발을 택한 것이 아니라, 택할 수밖에 없었다
2004년 02월 09일 (월) 00:00:00 오마이뉴스 webmaster@ohmynews.com

   
▲ (1)(2)(3)은 진주멧사발이며, (1)은 국보 (2)는 보물 (3)은 대명물 (4)는 조선에서 식기였으나 일본에서는 찻사발이 된 경우
ⓒ2004 본문참조
첫 번째 기사에서 우리나라는 제기를 아주 신성시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기는 1)청동기와 유기(놋쇠)의 형태나 문양, 장식을 흉내 냈고
2)문양이나 장식이 없으면 굽을 높게 만들었으며
3)굽이 높지 않으면 굽에 홈을 파거나 4)청동기의 요철 문양을 단순화시켜 물레선으로 제기임을 나타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 기사에서 1)진주사발 중 일본에서 국보와 보물이 된 사발은 굽이 높아 밥공기로 사용할 수 없으며, 굽이 높다는 것 그 자체가 제기임을 알 수 있고
2)진주사발이 노란색인 것은 유기(놋쇠)를 모방하기 위해서 조선 사기장이 인위적인 불 때기를 통해 일부러 만든 때깔(색깔)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세 번째 기사에서는 1)진주 멧사발의 선명한 유방울(일본말: 가이라기)을 통해 일반 식기와 다르게 제기임을 나타냈고,
2)진주사발의 유방울은 우연이 아니라 자연미를 살리기 위한 의도적인 창작 행위라고 설명했습니다.

네 번째 기사에서는 1)일본인이 진주사발을 ‘이도자완’이라 부르며, 이도자완의 약속을 정해놓고 있습니다만, 이 이도자완의 약속은 우리 조상 제기의 약속이었음을 설명했습니다.
2)진주사발의 태토는 정제되지 않은 백자 태토(핑크C+점토)이고, 이 광맥은 옛날 진주목 부근에 해당되는 지역에 지금도 있습니다.
3)그리고 제기는 옛 무덤에서 출토되지 않고 일반 밥공기는 현재도 우리의 옛 무덤에서 출토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진주사발 중 제기는 제사 때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을까요? 제사 때 ‘메를 올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제사상에 ‘밥을 올리는 것’을 뜻합니다.

   
▲ 우리의 옛 식기사발
ⓒ2004 동양도자미술관

일본에서 ‘대이도자완’이라고 부르는 진주사발은 멧그릇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됩니다. 따라서 필자는 제기용이었던 진주 사발을 ‘진주 멧사발’이라 부릅니다. 제사 때에는 멧그릇을 좌측의 사진과 같이 항상 뚜껑을 덮어 제사상에 올렸습니다. 우측의 사진과 같이 일본에서는 우리 진주 사발 중 뚜껑 부분을 ‘평이도(平井戶)’라 부르며 여름용 찻사발로 쓰고 있습니다.

   
▲ 위는 일본에서 진주사발의 뚜껑을 평이도(平井戶)자완이라 부르며 여름에만 찻사발로 사용, 아래는 진해 웅천 두동리 시굴보고서에서 발췌
ⓒ2004 본문참조
우측의 사진은 옛 진주사발 고요지 중 한 곳인 웅천 두동리에서 출토된 진주 사발의 뚜껑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발이 출토될 때에는 사실 뚜껑과 함께 나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뚜껑은 이미 파손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조선 시대 지방에서는 사발의 뚜껑을 접시로도 사용했습니다.

청이도, 고이도라 불리는 진주 보시기

조선 시대에는 제사를 지낼 때 밥을 담아 올리는 멧그릇과 국 담는 갱기, 또 흔히 '시접'이라 불리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얹는 그릇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도자기가 제기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사기’ 또는 ‘모반’이라 불리는 띠를 세우는 그릇도 있었습니다. 이 모사기는 <상례비요>라는 고서에는 ‘사발을 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네즈미술관에 소장되어있는 진주 보시기 입니다. 굽에 홈이 파여 있습니다.이것 또한 제기이기 때문입니다.
ⓒ2004 네즈미술관
그리고 조선 시대 제사를 올릴 때에는 정과보시기(과자를 담는 그릇), 침채보시기(김치를 담는 그릇)를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그만 종지 네 개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접시도 제기용으로 특별히 만들어서 사용했습니다. 보시기는 사발보다 모양이 조금 작은 것으로 보시기를 ‘보아(甫兒)’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보시기는 밥상에 김치를 올린다든지 반찬을 담을 때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용 보시기는 형태가 특별했습니다. 형태가 특별한 제사용 보시기로 쓰였던 진주사발을 일본에서는 찻사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정과보시기, 침채보시기로 사용 되었던 청이도(靑井戶), 고이도(小井戶)가 있습니다. 이 사발들은 제기용 보시기로 추정됩니다.

   
▲ 좌는 가네자와현립미술과 소장되어 있는 고이도(小井戶)자완, 우는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이도(靑井戶)
ⓒ2004 본문참조
옛 가마에서는 진주 멧사발과 진주보시기는 제기용으로서 세트로 만들어졌다고 여겨집니다. 일본에서 진주사발 중 제기는 아주 높은 가치가 있지만 식기는 그 가치가 덜합니다. 한국의 고 미술계에서 제기용 진주사발과 닮은 출토품을 자완(井戶)이라 하여 아주 비싸게 거래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밝힙니다. 진주사발 중 가격이 엄청나게 비싼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대부분은 일본인들이 말하는 ‘이도의 약속’을 잘 지킨 제기였던 진주사발을 의미합니다. 또한 비싼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사발에 얽힌 족보 값으로 즉, 누가 사용했다던지, 그 상자에 무슨 기록이 있다던지, 어느 책에 올라 있다던지 하는 각 사발에 대한 특별한 역사에 대한 값어치입니다.

일본에서는 무덤에서 나온 찻사발이라면 찻사발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도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무덤에서 출토된 골동 사발보다 유명한 사기장들의 작품들이 훨씬 가격이 높게 측정됩니다. 또한 족보가 없는 조선의 골동 사발을 가지고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 새로운 족보를 만들기도 합니다.

만드는 방법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유명한 차인이나 스님으로부터 기자이몽이도처럼 사발의 이름을 받아 새로운 족보를 만듭니다. 이런 사실은 일본 골동상을 방문해서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본 국보사발들의 발우설에 관하여

국보사발이 부처님의 발우라는 내용의 소설을 쓴 분은 필자가 성사시킨 일본 국보사발 촬영 때 그 프로그램의 리포터로 따라온 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 분은 소설가였지 도자기 전문가는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이 국보사발의 위대함을 극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부처님의 발우라고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조선 시대 일반 제기는 절에서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절에서 사시(09:30~11:30) 사이에 부처에게 올리는 밥을 ‘마지’라고 부릅니다. 일반 제기를 이 마지용 사발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지금도 부처님에게 올리는 그릇은 일반 그릇과 달리 우리 제기의 특징 중 하나인 굽이 높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 사발은 우리 조상의 제기 속에 포함된 개념으로 부처님만을 위해 빚은 발우였다는 설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옛날에는 부처님과 조상님을 다 같이 모셨으니까요. 진주사발의 발우설은 어쩌면 제주도에 한국이 포함된 것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 발췌 : 지명스님의 ‘발우’
ⓒ2004 지명스님
이 발우 사진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선 초까지 예불 때에는 부처님에게 차를 올렸고, 찻사발도 생겨났습니다. 물론 가능성이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에게 올리는 대부분의 도자기 그릇들은 제기용으로 빚은 것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그 사발은 부처님께 올리는 찻잔으로도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부처님의 찻그릇으로만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제기는 절에서도 불기로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진주사발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까요?

일본에서 진주사발을 가장 먼저 차의 세계에 도입한 사람은 다케노조오(武野紹鷗)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왜냐하면 다케노조오가 활약할 당시에는 조선 사발의 인기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고 <일본 차회기의 연구> (타니 씀, 담교사 펴냄)) 다케노조오는 일본 다도 정신을 확립한 센노리큐(千利休)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 센노리큐
ⓒ2004 일본의 다도
우리 사발의 미학을 일본 다도와 확실히 접목시킨 사람은 센노리큐입니다. 센노리큐에게 다도를 배운 사람들은 그 당시 일본 최고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센노리큐는 지금으로 말하면 자유 무역항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의 우두머리이자 차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죠닝(상인)의 차’가 현재 일본 다도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센노리큐는 상인 출신으로서 위대한 차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사정을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자유무역항 출신으로 그 곳 상인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진주 사발이 조선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식기였다면, 상인 출신의 센노리큐가 그 당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무사들에게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조선 사발을 명품이라 속이며 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센노리큐가 무사들에게 추천한 진주 사발은 흔히 쓰던 식기가 아니라 조선에서도 귀한 제기였기 때문에 그도 권력자들에게 진주사발을 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본에 있는 제기용인 진주사발이 막사발이라 불리게 된 이유

일본의 민예 운동을 일으킨 야나기무네요시(柳宗稅)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진주 멧사발인 기자이몽이도를 보기 위해서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는 인연이 닿아 제기였던 국보 사발을 대덕사 고봉암에서 친견할 수 있었고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 필자의 아버지 '신정희'와 필자의 작업 전경
ⓒ2004 신한균
“아주 평범한 물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그것도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하는 찻사발이다. 아주 볼품없는 물건이다. 전형적인 잡기이다. 가장 값싼 보통의 물건이다. 만드는 자는 비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개성 따위는 아무런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사용하는 자는 대수롭지 않게 사용했던 것이다. 자랑 거리로 산 물건은 아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것, 누구나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찻사발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성질이다. 이것은 평범함의 극치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틀림없는 천하의 명기 대명물의 정체이다.”

이 글은 한국에서도 많이 소개되어 조선 사발의 입문서에 해당하는 글로 많이 읽혀졌습니다. 일정 시대 때 야나기가 쓴 이 글로 인해 우리의 위대한 진주 멧사발이 알려지고 한국에서 막사발이라고 불려지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 식민 사관적 관점으로 우월 의식을 가지고 진주 멧사발을 본 데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사람은 우리처럼 사발에 밥을 퍼서 상에 놓고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이 아니라 사발을 손에 들고 입으로 사발을 갖다 대 젓가락으로 먹습니다. 따라서 굽이 높아도 밥공기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주장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실 국보이자 진주 멧사발이었던 기자이몽이도를 보고 밥공기라 말하는 일본인은 야나기무네요시가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도예가도 아니었으며 도자기 사학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오판을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 필자가 빚은 진주사발
ⓒ2004 신한균
그러나 조선 사기장의 후손인 우리들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조상을 위해 정성껏 빚었고 창조적 장인 정신의 발로인 이 사발을 막사발이라 부르다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주 사발은 일본인에 의해 예술품으로 승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용(用)의 미(美)’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미학적 파격을 통해 한민족의 얼을 승화시킨 명품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모든 진주 사발이 잡기였다고 주장하는 일본인들의 논리를 누구도 반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혼을 가지고 자연미를 추구하는 ‘한국의 미’를 애상미로 격하시킨 일본의 논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강하게 주장합니다. 일본인이 자기 마음대로 정한 진주사발의 약속 즉, ‘이도자완의 약속’은 실은 조상을 하늘처럼 섬기는 우리 한민족이 정한 ‘제기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주사발 중에서 제기로 쓰인 명품 사발은 일본 차인들의 눈에 의해 발견된 것이 아닙니다. 심미안을 가진 차인이라면 누구라도 진주사발의 미학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기용으로 정성껏 빚어진 진주사발을 찻사발로 선택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진주사발은 일본 차인들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안목이 있는 차인이라면 누구라도 찻사발로 선택 할 수밖에 없었던 천하의 명품입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인이 말하는 진주사발의 미학인 ‘무기교’ ’무작위’의 맛은 우연히 나타난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선 시대에 자연미를 추구하던 조선 사기장의 의도적 창작에 의해 자연스럽게 표출된 한국미의 정수인 것입니다.

‘일본국보사발은 왜 조선의 제기인가’를 끝내면서

지루한 글을 읽어주신 <오마이뉴스>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기사에 등장한 일본국보사발은 필자가 직접 만져보고 출판게재 허가를 받아 사진을 올린 것입니다. 책에서 나온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 일본 보물이 된 진주멧사발 (중요문화재)
ⓒ2004 일본 개인
예를 들면, 사진의 진주 멧사발의 출판게재허가를 위해 일본을 다섯 번이나 방문하여 이것을 소장하고 있는 개인을 만나 설득에 설득을 하여 허가를 받았습니다.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묻는 독자들도 있지만 놀랄까 봐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사발에 대한 잡기론 혹은 ‘막사발’이란 명칭은 무서운 식민지 지배 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부디 이 기사의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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