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예산유용 사건인 '안풍' 사건과 관련, 강삼재 한나라당 의원이 6일 오후 2시부터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노영보 부장판사) 심리로 서울고법 404호 법정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안풍 자금'을 받았다고 밝혀 파문이 예상된다.

또 재판부는 강 의원의 진술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의 증인 출석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오는 3월 12일 열릴 공판에 김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이에 따라 전직 대통령이 법정의 증인으로 서게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질지 여부가 주목된다.

강 의원은 이날 공판에서 "나는 당시 당 사무총장으로 있었고, 신한국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집무실에서 940억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이어 자금의 출처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이 돈을 건네주면서 출처에 대해 설명을 들은 적은 없고 선거를 앞두고 받은 돈이었기에 선거자금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며 "이것이 안기부 자금이라는 것은 검찰 수사가 이뤄질 당시 신문을 통해 긴가민가 하다가 검찰이 기소하면서 공소장을 보고 정확히 알았다"고 진술했다.

또 강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이 주신 돈은 사무총장으로서 알뜰하게 사용해 한 명이라도 더 당선시키는 것이 제 책무라고 생각했다"면서 "이후에 안기부 자금인 것을 알고 당황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강삼재 "국민과 역사에 배신할 수 없었다"

특히 강 의원은 자금 출처의 '진실'을 말하는 심정을 다음과 갈이 밝혔다.

"정말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문제가 불거진 후 지난 3년간 많은 날들을 잠 못 이루며 걱정했다. 국민과 역사만이 진실을 바라보고 있다. 정치계에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말해왔다.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하는 등 나는 모든 것을 던져왔다.

'무죄'를 받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나는) 국민들이 정치권에 갖는 냉엄한 시선을 직시하고 있다. 국민과 역사에 더이상 배신을 할 수 없었다. 늦게나마 진실을 밝혀서 신성한 법정에서 제 뜻이 기록되길 바란다. 20년 동안 몸담은 입법부의 일원이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왔고, 대한민국 사법부를 존경해왔다. 그동안 제가 결국 진실을 외면하고 결과적으로 사법부의 권위를 훼손시킨 것은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이같은 진술에 앞서 강 의원은 "지난 2003년 9월 24일자로 국회의원을 은퇴한 것은 한 시민으로 돌아가 무죄를 밝히겠다는 뜻이었다"며 "5선 의원으로 키워준 마산 시민과 경남도민께 면목이 없고 부인에게도 낯을 들 수 없다"고 심경을 전했다.

 재판부, 김영삼 전 대통령 증인 채택... 3월 12일 오후 2시 출석

법정에서 강삼재 의원의 변호인인 장기욱 변호사는 "이제야 이번 사건이 출발점에 와있다고 생각한다"며 "검찰이 엉뚱한 사람을 피고인으로 기소한 것이고 (피고인은) 당시 (강 의원에게 돈을 건넨)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장 변호사는 "돈이 100∼200만원만으로도 문제가 되는데 몇백억원이 왔다갔다한 것이 문제가 안된다는 것은 세 살 아이도 안믿는다"면서 "실무책임자인 강 의원만 조사를 받고 기소돼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김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세워주길 요청한다"고 말했다.

이를 놓고 강 의원과 함께 기소된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의 변호인이 굳이 김 전 대통령까지 증인으로 출석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잠시동안 공방이 오갔다. 법정이 소란해지자 재판장은 5분간 휴정을 하고 양측 변호인과 의견을 조율했다.

이어 노영보 부장판사는 "강삼재씨의 진술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의 증인 출석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라며 "김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채택하고 다다음 기일인 오는 3월 12일 오후 2시에 증인으로 출석토록 통보하겠다"고 밝혔다.

또 노 부장판사는 "김 전 대통령을 소환해서 묻는 것이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며 "저희 희망이긴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출석한다면 그때 이번 사건을 종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김기섭씨는 이날 법정에서 "강 의원이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자꾸 사실이 아닌 것으로 언론 플레이 하는 등 납득할 수 없다"며 "문민정부의 안정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나 혼자의 결정으로 안기부 예산을 모아 대통령이 아닌 당에 지원했다"고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이에 재판부는 김씨에게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지원을 했는가'라고 물었으며, 김씨는 "다음 재판 때까지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제공했는지를 진술서로 밝히겠다"고 말해 어떤 내용이 드러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재판부는 김씨에게 진술서를 다음 기일 5일전에는 진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구속기소된 김씨는 지난달 18일 법원의 보석 허가로 풀려난 상태이며, 현재는 건강이 좋지 않은 관계로 병원에 입원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 재판은 오는 27일 오후 2시에 열린다

검찰 "YS 조사여부, 수사팀 의견 들어보고 결정"

강 의원의 이날 '폭탄 선언'으로 안풍 재판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됐다.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의 전면 재조사도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이날 강 의원의 법정 진술의 신빙성 여부를 검토한 후 전·현 수사팀의 의견을 수렴해 조만간 방침을 결정키로 했다.

문효남 대검 수사기획관은 이날 오후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 여부 등에 대해 당시 수사팀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문 수사기획관은 "당시 수사팀이 강삼재 의원 공판에도 관여하고 있다"며 "이들은 계좌추적과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의 진술 등으로 그 자금이 안기부돈이라고 100% 확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박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긴급논평을 통해 "한나라당이 나랏돈으로 선거를 치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박 대변인은 "그동안 한나라당은 선거자금으로 국가예산을 전용한 적이 없고 안기부 예산을 쓴 적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며 "강 의원의 고백은 고민 끝에 내린 결단으로 본다"고 말했다.

반면 장전형 민주당 부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한나라당에 돈을 전달한 김기섭 전 안기부 기조실장이 '한나라당에 전달한 돈은 명백한 안기부 돈'이라고 법정에서 진술했는데도 강삼재 의원이 이제와서 YS 돈이라고 고백한 배경이 궁금하다"면서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강삼재 의원이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을 보호하기 위해 YS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으로 보인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장 부대변인은 또 "한나라당으로 들어간 1200억원이 안기부 돈이든 YS 돈이든 한나라당은 즉각 국민 앞에 사죄하고 국가에 반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