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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연," 막걸리 잔에 담긴 행복지수 "
2011년 03월 24일 (목) 20:31:16 김필연 phila4u@hanmail.net

김필연

   
▲ ⓒ김필연

며칠 전, 길 가다가 업소용 그릇 파는 가게가 보이기에 주저 없이 들어섰다.

몇 년째 쓰고 있는 이 빠지고 길게 금이 간 막걸리 잔이 눈에 어른거려 엔간하면 바꾸겠다는 심산이었고, 요즘 들어 부쩍 유산균 덩어리인 생막걸리를 마셔야 한다고 '생'을 강조하면서 막걸리 반주를 고집하는 남편 때문에 그 이 빠진 잔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가게에 들어서자 주인아저씨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라며 능숙한 눈짓으로 나를 훑어 보더니 '막걸리 잔'이란 말이 내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몇 개 필요하세요? 한 200개 정도 가능합니다."
                              
아저씨는 신이난 듯 묻지도 않은 가게 재고량까지 덧붙여 대답한다. '깜짝이야? 무슨 막걸리 잔을 200개 씩이나? 마실 사람이 셋인데 세 개면 족하지..., ' 중얼거리면서 기웃대는 내게 순식간에 다가온 아저씨는 "몇 개 필요하세요?" 몇 개에 강세를 주어 재차 묻는다.

날 음식점 주인으로 착각을 했나 보다, 여긴 프로만 상대하나?
그렇담 아마추어에게는 소매가격으로 거래하겠지? 프로인척 해볼까? 짧은 시간에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나는 의연하고도 당당하게  "네 개요!" 했더니,  "아이코~ 네 개요? 내 말을 복창하는 아저씨 얼굴에 실망의 그림자가 역력하다.

 참나, 내 딴에는 세 개 살까 하다가 스펙을 팍 올렸구먼. 이것저것 집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내 등 뒤에서 아저씨는 관심 없는 척 딴청을 부린다. 돈도 안 되는 성가신 손님이란 몸짓이다.

그런다고 기죽으면 안되지..., "이거 한 개에 얼마에요?"
평소 내 목소리보다 반 옥타브쯤 높인 톤으로 물었다. "4,000원입니다...,"
높낮이 없는 소극적 어조로 가격만 힐끔 던지고는 아저씨 또 딴청이다.
생각했던 가격에 비해 저렴하다 싶었는데 돌아서는 아저씨 옆 얼굴에 살짝 숨은 익살기 어린 미소가 내 장난기를 부추겼다.
                              
"이거 재료비는 500원도 안 들었겠구먼요. 3,000원에 주세요!"
"200개를 사셔도 4,000원입니다. 사모님!" 움직일 수 없는 가격이라는 듯 이번엔 사모님에 강세를 주어 깍듯한 어투로 응대한다.

그렇게 아저씨와 나는 흥정 같지도 않은 말장난을 주고받은 끝에, 여덟 개에 2만 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잔의 용도가 수정과 종지라는 대목에서 구매량이 네 개에서 여덟 개로 배나 뛰었고, 200개를 사도 4,000원이라던 단가는 2,500원으로 하향 조정, 아저씨 스스로 내가 제시한 가격보다 한 개에 500원이나 덜 받으셨다. 이런 손님은 퍼뜩 보내는 게 이익이다 싶었을까.

따져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가게 아저씨는 네 개 팔 것을 여덟 개 팔았으니 매출을 두 배나 올렸고 나는 다섯 개 값으로 여덟 개를 손에 쥐었으니 표현 그대로 '동반성장' 아닌가. 연신 아저씨의 얼굴에 익살스런 미소가 떠나지 않은 걸로 봐서 피차 즐겁게 지분대며 흥정을 즐긴 셈이다.

저녁 무렵, 남편에게 새로 산 막걸리 잔을 보여주며 흥정한 얘기를 늘어놓았더니 잔의 모양새에는 무심하던 양반이 아들에게 "축하주로 막걸리가 있어야겠다!" 라며 유쾌하게 운을 띄운다.
                              
막걸리 맛이 여느 때와 달랐음은 물론이다. 유명 작가의 수제품도 아닌 분명히 틀에 넣어 찍어냈을 성싶은 업소용 술잔 몇 개가 그날의 행복지수를 훌쩍 높여 놓았다. 세계 어느 명품이 이런 재주를 지녔을까. 익히 알듯 행복지수는 양이나 수나 품질의 순서가 아님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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