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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 (高慶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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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하회마을 소나무숲 |
가을은 물의 그림자조차 깊다. 가을에 떠나는 여행은 외로움이 깊거나 서러운 사람들의 몫이어서 산은 산대로 아낌없이 품어주고 물은 물살의 세기를 낮춘다. 무작정 길을 떠난다는 것은 인생의 로드맵을 다시 그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떠나는 사람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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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꽃(구절초) 한묶음 가슴에 안고/고경숙 시인 |
물론 그럴 때의 동행은 낯익은 얼굴들이 아닌 오래된 지기, 그러니까 유년시절 우사에서 맡았던 헛헛한 짚 냄새나 갯내 가득 묻은 바람같은 것이라면 더욱 좋겠다.
곳곳을 막고 보수하는 도로를 피해 버스는 IC를 빠져 국도로, 다시 고속도로로 요리조리 일탈을 돕는다. 일상의 무게가 이리도 무거웠단 말인가. 동으로 동으로, 남으로 남으로 꼬리를 물고 달아나는 차들···
수도권을 탈출하는 차량들이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가속한다. 집집마다 감나무 주렁주렁 빨간 등을 내걸고 경고하지만 아랑곳 않고 달리는 차량들은 이미 감속할 의지가 없다. 시나브로 가을 속으로 떠나는 길이다.
능라(綾羅)로 휘감은 도담삼봉
가지가 휘어지도록 풍년이 든 감나무를 보고 그 집의 형편이 넉넉한지 아닌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행복의 수치는 어림잡을 수 있다. 감의 채도는 꼭 그런 따스함을 지녔다.
정오의 가을볕이 제법 따갑다. 며칠 전 때 아닌 한파로 채마밭 여물지 못한 고추들이 된서리에 얼어 죽은 것은 어쩌라고 말이다. 호반에 우뚝 솟은 도담삼봉 주변으로 물비늘이 하얗게 반짝인다. 빛의 각도에 따라 물결이 제 몸을 뒤척일 때마다 보석보다 더 찬란한 저 심중은 또 얼마나 깊은지 해그림자까지 차츰 물러나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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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담삼봉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 부천문화원 가족들 |
삼삼오오 호반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 인파들의 오늘은 추억의 배경이 될 것이다.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회상할 때쯤이면 과거속으로 내달린 시간들은 흙으로 내려앉겠지만, 그럴 줄 알고 있지만, 과거와 미래의 점이지대에 서있는 우리 또한 저 도도한 물길처럼 그저 오늘은 빛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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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회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 |
철든 물줄기 하회마을을 감싸고...
곡선의 힘은 타협에 있다. 불굴의 의지는 나아가기는 적당하나 지속성은 떨어진다. 사납다는 것은 배타의 대상이 되니까··· 물이 불을 이기는 것은 때로 물러설 줄 알고 돌아갈 줄 아는 법을 먼저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바라보는 하회마을의 물줄기는 세상사는 이치를 일찌감치 깨달은 철든 흐름이다. 집집마다 흘러내리는 처마의 선과 담장의 휘어진 길 사이로 모과나무 감나무가 풍성하게 세월을 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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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회마을 처마의 선과 담장의 휘어진 길 사이로 모과나무 감나무가 풍성하게 세월을 잊고 있다. |
돌담을 쓰다듬으니 가을햇살의 따스함과 거친 질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마치 어머니 손등을 만지는 착각이 든다. 여염집 돌담은 안과 밖의 '차단'이란 개념보단 형식적인 '경계'에 불과해 오히려 들여다보는 이들을 위한 배려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오래 전 이곳을 찾았을 때 훼손된 돌담이 최근 보수를 하면서 담장이 이리도 높아졌나 싶게 키를 훨씬 넘는다. 아직도 고택에 사람이 살고 있으니 사생활 보호차원일거라고 서운함을 달래본다.
돌담마다 기와를 얹어 단순한 울타리가 아닌 집의 연장선 대접을 받고 있는 이곳, 나무도 고령이어서 점잖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물가에 갈대들뿐, 나무는 미동도 없는 하회마을... 돌담길을 오래 걷는다.
가을을 찾아 떠난 여행의 끝은 결국 우리들 자신이다. 쿵쾅거리던 삶을 피해 잠시 나를 잊겠다고 떠난 길은 돌아보니 내 안이다. 심장에서 멀어지면 피돌기의 흐름은 느려지고, 먼 가을하늘가 떨리는 단풍잎, 차가운 바람, 물소리를 들으며 떠오르는 그리운 추억들은 결국 내 심장에 내재되어있던 기억의 파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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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회마을 돌담길 |
가을은 풍요와 쇠잔을 동시에 갖고 있다. 소멸로 가는 시간들은 내년 봄을 기약하는 생성과의 깊은 약속이다. 낙엽속에 묻혀 시린 겨울을 이겨내고 새싹을 돋울 생명체들처럼, 돌아보면 우리 삶의 제재들 또한 힘든 오늘을 지나 희망이 되어 돌아오리라. 우리가 꽉 쥔 세월의 끈을 놓치만 않는다면 말이다.
가을 속으로 떠난 나··· 다시 돌아와 거울 앞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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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회마을 삼신당(三神堂) 을 지키고 있는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 |
고경숙(高慶淑) 프로필
2001년 계간 시현실로 등단/ 1999년 제 4회 하나.네띠앙 인터넷 문학상 대상/ 2000년 수주문학상 우수상/ 2008년 두레문학상 /시집 '모텔 캘리포니아'(2004), '달의 뒤편'(2008) /수주문학상 운영위원/블로그http://blog.naver.com/bez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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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문화원 가족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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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담삼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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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하회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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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문화원 가족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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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회마을 지붕 기와에 자라는 소나무 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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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zital@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