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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엔 '꽃담', 정지용 생가엔 '토담'
[한국의 아름다움] 우리의 담장에는 표정이 있다
2004년 01월 30일 (금) 00:00:00 오마이뉴스 webmaster@ohmynews.com

"동산이 담을 넘어와 후원이 되고 후원이 담을 넘어 번져 나가면 산이 되고 만다. 담장은 자연 생긴 대로 쉬엄쉬엄 언덕을 넘어가고 담장 안의 나무들은 담 너머로 먼 산을 바라본다…담장은 자연과 후원을 천연스럽게 경계짓는 것이며 이러한 담장의 표정에는 한국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최순우 선생이 경복궁 담장을 두고 한 말이다.

   
▲ 금산 보석사. 담장은 쉬엄쉬엄 언덕을 넘어가고. ⓒ2004 김정봉

 경복궁 향원정의 지붕은 북악의 봉우리 선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북악의 봉우리가 담을 넘어와 향원정에 내려 앉아 지붕을 이루고 있다. 당시 향원정을 지었던 목수의 머리는 담 너머 북악의 봉우리를 향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는 그 봉우리 선을 빌려 향원정 지붕을 지었을 게다. 여기 향원정의 담장은 그저 자연과 후원을 자연스럽게 경계 짓는 역할을 할 뿐이다.

   
▲ 경복궁 향원정. 향원정의 지붕과 북악의 봉우리가 잘 어울린다. ⓒ2004 김정봉

경복궁의 담장이 자연과 후원을 경계 짓는다면 소쇄원의 담장은 자연과 인공을 경계 짓는다. 계곡 위에까지 이어진 담장은 더 이상 담장이 아니라 자연을 적절히 제어하여 인공미를 극대화하는 예술품이다. 이 담장으로 인하여, 두 개의 입 구('口') 자 모양의 구멍을 통과하는 물은 흩어짐 없이 한데 모여 오묘한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소쇄원의 매력은 계곡 위에 세워진 이 담에 있다 하겠다.

   
▲ 소쇄원. 계곡 위의 담장이 절묘하다. ⓒ2003 김정봉

담장은 후원과 자연, 인공과 자연을 적절히 구분하여 아늑함을 더해주고 인공미를 살려 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옛 것과 새 것, 질 좋은 문화와 나쁜 문화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낙산사를 둘러싸고 있는 방형의 별꽃 무늬 담장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그래서 1000년 후의 일을 내다보며 담을 쌓는 데 그렇게 공을 들였는지 모르겠다.

   
▲ 낙산사. 별꽃 무늬 담장은 예쁘기도 하지만 그 역할도 훌륭하다. ⓒ2004 김정봉

담장은 궁궐이나 민가의 얼굴이다. 산울은 산울대로, 토담은 토담대로, 사고석담은 사고석담대로 표정이 있고 그 집의 권위와 느낌, 주인의 사상과 개성이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의 담장은 상징성을 띠고 있다.

벌교 홍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소설 <태백산맥>의 인물인 김범우의 집이 있다. 전형적인 지주의 집으로 집 안에서는 담 너머로 자기가 소유한 농토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전혀 들여다 볼 수 없다.

   
▲ <태백산맥> 인물 김범우의 집 ⓒ2003 김정봉

이는 까치발을 하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우리의 담과는 거리가 멀다. 민족주의자로 그려지고 있지만 좌익과 우익 어느 편에도 속하지 못하고 고민하다 결국 인민군에 가담하는 김범우.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담을 보고 있으면 지주의 아들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갖는 김범우의 또 다른 담이 느껴진다.

이와는 대조적인 담으로는 홍성에 위치한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의 울타리를 들 수 있다. 나무 울타리로 되어 있고 누구나 맘만 먹으면 울타리를 약간 제치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다. 가진 것이 없으니 담을 견고하게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로, 승려로 그리고 시인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 되었으니 그 이름이 더욱 빛난다.

   
▲ 홍성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 ⓒ2003 김정봉

한용운 생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김좌진 장군의 생가가 있다. 김좌진 장군은 한용운 선생과는 대조적으로 부유한 명문대가 출신인데 이에 걸맞게 담도 견고하다. 하지만 담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 위압적이지 않다. 기단부에는 돌을 다듬어 쌓아 다진 뒤 기와와 돌로 점선 무늬를 놓아 멋을 부렸다. 노비를 해방시키고 가산을 정리해 학교를 세우는 등 진취적 기상이 강한 선생의 뜻이 배어 있는 듯하다. 담 높이가 우리의 눈높이어서 기분이 좋다.

   
▲ 홍성 김좌진 장군 생가. ⓒ2003 김정봉

장소를 옮겨 시인 정지용의 생가 옥천으로 가보자. 생가의 담은 토담이다. 우리 나라 시골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담이다. 흙 덩어리를 쌓아 올리고 간간이 돌을 박아 넣어 질박한 무늬를 놓았다.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으로 토담과 썩 잘 어울린다.

   
▲ 옥천에 있는 시인 정지용 선생 생가. ⓒ2003 김정봉

우리 나라에서는 담을 쌓더라도 그냥 쌓지 않고 거기에 기와 조각이나 돌이라도 박아 예쁜 무늬를 놓으려고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담을 '꽃담'이라 하는데 꽃담은 담에다 무늬를 놓아 장식한 담을 통틀어 말한다. 질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시골 토석담에서, 화려한 듯하면서 튀지 않아 수수하고 그러면서도 정교하여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는 궁궐의 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꽃담의 백미는 경복궁 자경전 서쪽 담이 아닌가 싶다. 밝은 황토색 전돌과 그을린 황토색 전돌로 표현한 직선과 점선 무늬 그리고 네모와 벌집을 흉내낸 육각, 자경전 합각의 세모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걸작이다.

   
▲ 경복궁 자경전 서쪽담. ⓒ2004 김정봉

자경전 꽃담은 서쪽 담의 형상 무늬에서 절정에 이른다. 꽃 몽우리를 머금고 있는 늙은 매화나무와 매화나무 가지에 걸린 달, 거기에 놀러온 새가 세심히 표현되어 있고 이 밖에 난초, 국화, 대나무, 석류, 연 등의 형상 무늬를 집어 넣어 담을 장식해 놓았다.

   
▲ 경복궁 자경전 서쪽담에 있는 매화나무 무늬. ⓒ2004 김정봉

우리 나라의 담은 나와 너를 구분하는 원시적인 역할 이외에 나와 자연을 경계 지으며 자연 속에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준다. 자연 세계와 나의 세계는 담으로 단절되지 않고 담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교감한다. 나의 세계는 자연과 동화되고 그것이 담에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궁궐에 토담은 어울리지 않으며 시골에 사고석담은 어울리지 않는다. '김범우의 담'이 명문사대가의 담을 대신할 수 없고 여인의 향기가 나는 아미산과 자경전에는 창덕궁 승화루의 절제된 담이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담은 우리 나라의 정서가 담겨 있다. 높지도 그렇다고 얕지도 않은 우리의 담장은 중국의 그것과 다르다.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아 폐쇄적인 김범우 집 담장은 그래서 우리의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평창동 높은 담을 보면 한편으로 부러우면서도 거부감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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