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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버 스탬프 레퍼렌덤(Ruber stamp referendum)
[황인오 칼럼] "국민투표'는 독재자의 고무도장?"
2010년 03월 03일 (수) 00:17:53 황인오 i-fire@hanmail.net

황인오(전 부천시민연합공동대표)

미국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서구에서 성립한 근대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과정이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근대민주주의의 본고장인 서유럽에서도 선거권을 가진 시민의지를 빙자한 독재자가 종종 출현한 것이다.

   
▲ 황인오ⓒ부천타임즈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방 일파가 실각한 뒤 반동의 물결 가운데 등장하여 독재자가 된 나폴레옹은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민주주의를 부정하고 형식적인 국민투표를 통해 통령제를 무력화하고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 역시 국민투표를 거쳐 황제에 올랐다. 20세기를 가장 끔찍한 야만의 시대로 만든 인물로 단연 히틀러를 꼽을 수 있다.

더러 오해하기는 히틀러가 독일국가의 절대 권력을 손에 넣은 것은 쿠데타와 같은 비합법적인 수단을 썼다고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나 그는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하였다.

당시로는 가장 완벽하게 민주주의를 제도화한 바이마르 헌법 규정에 따라 선출된 의회의 결의에 따라 그 유명한 수권법(授權法), 즉 히틀러 한 사람에게 국가통치에 관한 절대 권한을 부여하는 이른바 '니 맘대로 법' 을 통해 나름의 정당성(legitimacy)를 얻은 것이다. 히틀러가 총선에서 제 1당이 된 뒤 독재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나치의 폭력과 함께 자주 동원한 것이 국민투표였다.

이때 히틀러가 동원한 국민투표는 레퍼렌덤(referendum)이 아닌 플레비사이트(plebiscite)로 표기되는 것으로 약간 성격이 다른 것이기는 하다.

레퍼렌덤(referendum)과 플레비사이트(plebiscite)는 둘 다 국민투표로 번역되는데 앞의 것은 헌법 개정과 같이 부결되어도 요건을 달리하여 다시 투표에 붙일 수 있는 것이고 나중 것은 집권자의 신임을 묻거나 영토변경과 같이 재논의가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경우에 따라 특정정책의 가부에 집권자의 진퇴를 결부하여 양자가 결합한 형태의 국민투표도 종종 동원되기도 한다.

우리 헌법은 제 72조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에 대한 국민투표와 제 130조 헌법 개정 절차를 규정한 두 가지 레퍼렌덤을 인정하고 있다.

히틀러를 제외하고 유럽 대전 이후 서구에서는 집권자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러한 국민투표가 남용된 사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1969년 4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신임을 묻는 성격의 국민투표를 제기하고 부결되자 사퇴한 것이 전후 서구권에서 실시된 마지막 플레비사이트일 것이다.

대신 AAA지역, 즉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신생국 독재자들이 정치적 정당성(legitimacy)을 치장하기 위해 자주 국민투표를 동원하였다. 일단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들이 연임제한 등을 없애고 종신토록 집권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민투표를 즐겨 동원한 것이다.

이렇게 독재자들이 국민투표를 남용하는 것을 보고 1960년대 남미의 한 언론인이 러버 스탬프 레퍼렌덤, 또는 러버 스탬프 데모크라시, 즉 고무도장 국민투표, 고무도장 민주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고무도장 국민투표를 남용한 역사를 갖고 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강탈한 박정희는 18년 집권기간 동안 모두 4차례의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첫 번째 국민투표는 제 3공화국을 성립케 한 헌법 개정 투표로서 당시 야당세력과 합의를 거친 것이기에 성격을 달리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4.19 민주혁명으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헌법과 정부를 무력으로 짓밟지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될 투표였다.

 그 다음이 1969년 3선 연임제한 규정을 고치려고 세종로 국회의사당 제3별관에서 날치기한 헌법개정안을 확정하기 위한 국민투표였으며 1972년 친위쿠데타로 날조한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청학련과 인혁당 날조, 김대중 납치, 동아일보 광고탄압 등의 폭압으로도 수그러들지 않는 야당과 학생 등 민주세력과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유신헌법 개폐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기습적으로 실시한 1975년 2월 12일, 유신헌법의 존폐와 박정희의 진퇴를 건 국민투표가 있다.

동아일보 광고탄압으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군과 경찰, 전 행정력을 동원한 부정투표가 자행되었음에도 간신히 70%의 찬성률을 보여 주요 외신들은 사실상 패배라고 평가했던 국민투표였다.

국민투표를 주머니 속의 고무도장으로 여기던 박정희정권이 더 이상 국민투표를 입에 올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전두환 노태우 등 독재자들도 다시는 국민투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패로 쓰지 못하게 된 연유가 된 사건이다.

4대강 삽질로 국토를 결딴내고 말겠다는 이명박 정권의 반민주적 행태가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자중지란을 겪는 와중에 일부 친이계 의원들의 개인적 아이디어로 간간히 튀어나오던 국민투표 안을 청와대가 본격적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다.

전형적인 치고빠지기 수법으로 여론의 반응을 살피며 간을 보고 있지만 박근혜 의원 말고는 반대진영에 마땅한 대항마가 없는 상황에서 한번 써 볼만한 패로 검토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야당과 시민사회 등 진보 개혁진영에서는 이명박정권이 국민투표 패를 쓰기에는 부담이 많아 바람잡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고 보는 때문인지 그다지 긴장감이 없어 보인다.

여러 가지 득실을 재고 있겠지만 애초에 역사의식이나 국민통합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이 정권으로서는 유효투표의 과반수가 나온다는 계산만 서면 언제든 꺼내들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박정희정권이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90%가 넘는 찬성을 얻은데 비해 1975년 2월의 신임투표에서 70%를 넘긴 것에 정치적 부담을 가지고 다시는 국민투표안을 꺼내지 않았던 만큼의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고려도 없는 정권이라는 사실에 염두를 두어야 할 것이다.

지상파 방송3사를 완전히 접수하여 미디어 환경이 유리하다고 보는 상황에서 일단 국민투표 실전에 돌입하면 '우리가 남이가'를 되뇌며 수구진영과 영남이 똘똘 뭉치고 강남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을 일정하게 묶어낸다면 지방선거의 필패가 눈에 훤하고 집권당 내부의 복종도 이루지 못한 상황을 단꺼번에 타개할 패로 이만한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

물론 역사와 국민도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1969년 3선 개헌 당시에도 야당의 대선후보였던 윤보선은 두 번에 걸친 낙선으로 힘을 잃었고 야당지도자 유진오 유진산이 유력한 대안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야당은 똘똘 뭉쳐서 장열하게 싸웠다.

그 과정에서 김영삼 김대중 같은 젊은 지도자들이 떠올라 1971년 선거를 대비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면 촛불과 서거정국에서 나타난 민심의 향배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누가 훌륭한 장수인지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국민투표는 세종시 문제를 넘어 중간평가 성격을 띠어 사생결단을 내는 한판 싸움이 될 것이기에 6월 항쟁과 민주정부 10년의 경험, 무엇보다 이명박 정권 2년이 얼마나 많은 시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분열의 구도로 몰고 있는지 살 떨린 경험을 한 이들의 절치부심이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낼 역량도 충분하다.

석달 앞으로 다가 온 5대 지방선거에 관심이 집중해 있는 것은 그대로 당연한 일이고 충분히 역량을 쏟아야 할 일이다. 거기 못지않게 이 정권이 불순한 의도로 만지작거리고 있는 국민투표라는 패를 어디로 돌릴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국민투표가 독재자의 고무도장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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