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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사옥 '총독부 감시' 위해 세웠다고?"
정운현의 作心企劃 동아대해부-②
2009년 10월 18일 (일) 19:42:55 부천타임즈 webmaster@bucheontimes.com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중앙일보, 오마이뉴스편집국장, 언론재단 이사를 역임했던 정운현씨가 '창간 89년'을 앞둔 <동아일보>를 향해 "나이 값도 못하는 신문" 이라는 날선 비판과 함께 편집진의 졸렬하고도 비굴한 태도, 그리고 과거 일제하 동아일보 사주와 매체의 친일 등 반민족적 면모를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해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 모으고 있다. 

현재 태터앤미디어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인 그는 20여 년 전부터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일에 온몸을 불사르고 있는 자타가 공인하는 친일문제 전문가로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증언 반민특위>, <친일파 1·2·3> 등 다수의 친일파 관련 서적을 집필 출간했다.

"동아일보 하는 짓이 이렇습니다"라는 제하의 비판글을 "10회에 걸쳐 시리즈로 고발할 생각"이라는 정운현씨의 글을 본인의 양해를 얻어 게재한다./편집부 주

'역사왜곡' 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일본 역사교과서의 역사왜곡을 떠올립니다.  1910년 '한일병탄'('한일병합'이나 '한일합방'이 아니라)은 한국인들이 원해서 했다느니, 정신대(정확히는 '구 일본군 종군위안부')는 한국 여성들이 돈벌기 위해 스스로 자원했다느니, 그리고 일제지배로 조선이 발전(근대화)했다느니 등등의 '궤변' 말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한국인의 역사왜곡(혹은 조작)도 만만치 않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례 가운데 여기서는 두 가지 사례만 간단히 소개할까 합니다.

   
▲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졸업 후 2개월간의 견습사관을 마치고 임관 직전인 1944년 6월말 일본군 상사 복장의 박정희. 이 사진은 1997년 필자가 문경서 그의 제자에게 입수해 처음으로 공개했다

먼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해괴한 주장부터 보시죠. 이제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구사범 졸업 후 경북 문경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돌연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는 군관학교에 입학해 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는 일본육사로 진학해 졸업한 후 1944년 7월 1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1년 뒤인 이듬해 1945년 7월 1일 중위로 진급했고, 그로부터 한 달 보름만에 일제가 패망하면서 이듬해(1946년) 5월 패잔병의 신분으로 미군 LST를 타고 중국 천진에서 귀국했습니다. (※당시 그 배에는 교보생명 창업자인 신용호도 타고 있었지요)

임관 후 박정희는 중국 열하성 반벽산 인근 보병8단(연대)에서 단장의 부관으로 근무했습니다. 당시 보병8단에는 박정희 말고도 한국인 장교가 3명 더 있었습니다. 봉천군관학교 5기 출신으로 귀국 후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신현준(작고), 신경군관학교 1년 선배인 방원철(작고), 신경군관학교 동기생 이주일(작고, 전 감사원장) 등이 그들입니다.

저는 이들 가운데 신현준, 방월철 두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이들에 따르면 해방 때까지 자신들은 광복군의 존재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특히 박정희는 보병8단 근무시절 내근이어서 외부와 교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박정희가 광복군과 내통하면서 비밀리에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물론 박정희 본인이 그렇게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가 권력자가 되자 그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거짓 책자를 펴낸 것입니다.

 1967년에 박영만이란 자가 펴낸 <광복군>(전 2권)이라는 논픽션 소설이 그것입니다. 이 책 하권에서는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문제는 이 거짓 책자를 근거로 <창군전사>(육군본부, 1980년), <육사 졸업생>(장창국, 1984년) 등이 날조된 역사를 수정하지 않은채 이를 확대재생산해 왔다는 점입니다. 급기야 한 시사월간지에서는 이를 액면대로 인용하여 버젓이 기사로 사용하기도 했었구요.

   

   
▲ 박영만이 논픽션 소설로 쓴 <광복군> 상권(오른쪽) 표지와 하권(왼쪽) 속표지 모습(필자 소장본)

<월간조선> 1986년 8월호에는 '박정희의 만군(滿軍) 인맥'이라는 기사가 실렸는데요, 이 기사에 따르면, 박정희가 만주군 보병8단 근무시절 같이 근무했던 신현준 상위(대위), 이주일 중위 등과 함께 비밀광복군 조직에 착수했으며, 1945년 5월부터는 사병들을 광복군 요원으로 훈련시켰다고 나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모두 허위로 조작된 내용들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박정희 등 한국인 장교 4명은 해방이 되자 북경을 거쳐(방원철은 제외) 귀국했는데, 이들은 그 때까지 광복군의 존재 사실조차 몰랐다고 증언했습니다. 결국 <월간조선>에서 다룬 내용은 전부 '픽션', 즉 전부 거짓인 셈이죠. (* 참고로 박정희는 생전에 자신이 비밀광복군을 지냈다고 주장한 바는 없습니다)

두 번째 사례는 가짜 독립유공자를 만들어 내려다 들통이 난 사건입니다. <오마이뉴스> 대전주재 심규상 기자는 2003년 12월 17일자로 ‘독립투사의 공적비가 변조된 사연’이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내용인즉, 대전지역의 대표적 항일운동가인 김용원 선생의 비문에 전직 국회의원 출신인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의 조부 이돈직의 '확인되지 않은 독립운동 행적'이 무리하게 끼워 넣어져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이인구 명예회장의 조부 이돈직은 독립운동을 한 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인데, 김용원 선생의 공적에 이돈직을 끼워넣는 식으로 ‘독립운동가 만들기’ 작업을 한 것이었습니다. [참조-9년 만에 철거된 '미확인 독립운동가' 비문]

지난 2000년에 문제의 비석을 세운 주체는 '대전애국지사숭모회'라는 단체였는데요,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은 이 단체의 고문을 맡고 있었고, 이 단체의 회장은 이 회장의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냄새가 나는군요. 이들은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작업'을 해왔더군요. 우선 1차로 지난 1994년부터 김용원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에 무명의 '이돈직 끼워넣기'를 몰래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를 근거(?)로 1997년 대전 효평동, 원정동에 공적비를 세운 다음, 2000년에는 보다 대중적인 공간인 은평공원에 '번듯한' 공적비를 세운 것입니다. 이 '작업'을 하는 데 무려 10여 년의 기간이 걸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가짜 독립운동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부 역사학자들이 나서서 역사를 조작해주는 등 도움을 주기도 했더군요.

   
▲ 가짜 독립운동가 이돈직의 휘호비(왼쪽)와 생애비(오른쪽). 이 비석들은 금년 6월 대전고법의 판결로 철거됐다. 사진은 2003년 당시의 모습(출처-오마이뉴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이런 허위사실을 토대로 언론에 몇 번 보도되고, 또 책에 인용되고 하면서 진실로 둔갑된다는 점입니다. 실지로 1994년 2월 28일자 <중도일보>에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 '항일투쟁 비밀로' 유언"이라는 제목 아래 '독립운동가 이돈직 선생'의 일대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기사는 "대전 일원에서 치열한 의병활동을 해온 항일지사 이돈직 선생의 공적이 구전되어오다 최근에야 밝혀졌다"며 "광복운동을 벌인 것은 나라사랑과 후손을 위한 행위였던 만큼 자신의 행적에 대해 절대 비밀로 해달라는 유언이 있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의심할 독자가 과연 몇 있겠습니까? 신문에 났으니 다들 그런 줄 알겠지요.

한편 문제의 비석 철거문제를 놓고 당국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이대며 미온적 태도를 보이다가 금년 6월 대전고법이 문제의 비석을 철거하라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대전시가 이를 철거하면서 사건은 일단락 됐습니다. 심 기자는 2003년 첫 보도 이후 7년간에 걸쳐 무려 20건의 관련기사를 지속적으로 보도했습니다. 만약 <오마이뉴스>의 보도가 아니었다면 이는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어느 시점부터 이돈직은 독립운동가로 둔갑돼 역사책에 버젓이 실리게 될 것입니다.

지역의 토호와 빗나간 독립운동가 단체가 짜고 치고, 여기에 역사학자가 나서서 사료적 근거를 제공하고, 여기에 다시 언론이 가세해서 나팔을 불어주니 졸지에 독립운동가가 하나 생겨난 꼴입니다. 이 사례에서 보듯 힘있는 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역사를 왜곡, 조작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군요.^^

자, 그럼 이제 인촌 김성수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 동아일보 구사옥(현 일민미술관) 입구 오른쪽에 서있는 문제의 안내판(붉은 원)

앞서 7회에서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구 동아일보 사옥(현 일민미술관) 앞에 서 있는 안내판 얘기를 거론한 적이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조선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 인촌 김성수가 이곳에 동아일보 사옥을 세웠다’는 요지의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 얘기는 지난 1994년 5월 동아일보사가 광화문 신사옥에 언론박물관을 건립키로 결정했을 때 당시 김병관(작고) 회장이 "현 광화문 사옥은 1926년 조부(인촌 김성수 선생)께서 광화문 자리에 들어선 조선총독부를 감시해야 한다는 깊은 뜻에서 3층 건물을 처음 지었고 선친(일민 김상만 선생)께서 다시 증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동아, 1996. 4. 1 보도)고 얘기한 데서 비롯한 것을 보입니다.

그런데 7회에서도 언급했듯이 <동아일보>가 '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사옥을 건립했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동아일보> 홈페이지의 '회사소개'에 따르면, 광화문 사옥은 1926년 12월 10일 준공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총독부 건물은 역시 같은 해인 1926년 10월 1일 준공됐습니다. 총독부가 '10월 1일' 을 준공식 날짜로 잡은 것은 이날이 바로 '시정(始政)기념일', 즉 일제가 1910년 8월 29일(우리로서는 '국치일') 한국을 병탄하고서 그해 10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업무를 보기 시작한 바로 그날을 기념해서 이날 총독통치의 본산인 총독부 청사를 준공한 것입니다.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은 그로부터 두 달 열흘 뒤에 준공한 셈입니다.

우선 이 무렵이면 인촌이 설립한 경성방직(경방)이 1차대전 후 섬유산업의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촌은 총독부를 드나들면서 사이토 총독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그 결과 총독부는 1924년부터 매년 경성방직에 자금을 지원해주었습니다. 1924년에는 2만 8천원, 1928년에는 2만 7천원 등 총독부는 경방 사업 밑천(25만원)의 10%를 웃도는 거금을 매년 지원한 셈입니다. 그런 인연으로 1930년말 사이토가 병을 얻어 일본으로 돌아가자 인촌은 사이토에게 감사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인촌이 '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에 동아일보 사옥을 세웠다? 혹시 '총독부와 더 가까이 있으려고'가 아니고?

그럼, 카인즈에서 검색한 '총독부 감시' 관련 기사들을 한번 보시죠.

한국 최초 「언론박물관」 세웁니다/21세기 선도 정보­문화 메카
[동아일보] 1996-04-01 01면 종합 사고 924자
... 지배를 영구화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건물(현 국립중앙박물관)을 짓자 「조선총독부를 감시해야 한다」는 동아일보 창설자 인촌 김성수 선생의 뜻에 따라 현 위치를 선정, 1926년 총독부 건물에 이어 완공한 유서깊은 건물입니다. ...

동아일보 국내 첫 「언론박물관」 건립 의미
[동아일보] 1996-04-01 09면 2481자
광화문 사옥에 언론박물관을 건립키로 결정한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은 『현 광화문 사옥은 1926년 조부(인촌 김성수 선생)께서 광화문 자리에 들어선 조선총독부를 감시해야 한다는 깊은 뜻에서 3층 건물을 처음 지었고 선친(일민 김상만 선생)께서 다시 증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광화문 「동아 미디어센터」 오늘 기공
[동아일보] 1997-05-07 06면 기획,연재 2066자
...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은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자 「총독부를 감시해야 한다」는 동아일보 창설자 인촌 김성수(인촌)선생의 뜻에 따라 현 위치에 자리잡은 건물이다. 1926년 완공 이래 우리나라 ...

21세기를 향한 미디어센터(사설)
[동아일보] 1997-05-08 03면 정치·해설 사설 894자
... 새 장을 열어가는 일이다. 특히 동아미디어센터가 서울 세종로 한복판 동아일보 광화문사옥과 나란히 서게 된 것은 뜻깊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짓자 「총독부를 감시해야 한다」는 동아일보 창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의 선각에 따라 ...

[동아미디어센터 준공] 21세기 멀티미디어 문화의 중심
[동아일보] 2000-01-03 08면 05판 특집 기획,연재 3693자
... 모태였다. ◇仁村선생 "총독부 감시"◇ 1926년 동아일보사는 광화문에 3층 규모로 새사옥을 지었다.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는 “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동아일보가 광화문 한복판에 자리잡아야 한다”는 인촌선생의 뜻에 ...

[동아미디어센터 개관] 박태준 총리 축사
[동아일보] 2000-01-20 30면 41판 사회 텍스트 805자
... 사옥 자리는 일제 하에서 "조선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동아일보가 광화문 한복판에 자리잡아야 한다"는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선생의 뜻에 따라 동아일보가 터를 내린 뜻깊은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광화문을 지날 ...

[횡설수설] 김순덕 / 광화문
동아일보 정치 | 2002.12.31 (화) 오후 5:18
올렸다. 궁궐수비대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는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동아일보사 건물이 광화문 네거리에 지어진 것도 일제 총독부를 감시해야 한다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의지 때문이었다. ▷이처럼 광화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소리] 동아 사옥 총독부 감시 위해 세웠다?  -->이 문제를 처음 지적함!!
미디어오늘 칼럼 | 2003.05.26 (월) 오전 0:00
○…"이 건물은 조선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 동아일보가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해야 한다는 인촌 김성수의 뜻에 따라 1926년... 후세에 와서 친일파 반열에 올라 있겠는가"라면서 "동아일보가 총독부를 감시했다는 말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소리가... "

김학준 사장 "신문법, 우리 구속할 가능성 크다"
기자협회보 | 2006.03.31 (금) 오후 7:20
저는 오늘 아침 출근을 하면서 광화문 네 거리에 우뚝 선 사옥을 바라보며 새로운 감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해야 한다는 창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화정 김병관 선생, 언론자유 수호 등에 기여
동아일보 사회 | 2008.02.25 (월) 오후 2:07
나란히 자리 잡은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광화문 사옥이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짓자 '총독부를 감시해야 한다'고 했던 동아일보 창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의 선각에 따라 1926년 세워졌기 때문이다. 김 전 명예회장은 동아미디어센터 준공 ...

문제는 이같은 <동아일보>의 보도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에서 가짜 독립운동가 제조(?) 과정에서 보셨다시피 검증도 안된 것을 토대로 확대재생산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따르면, <동아일보> 구사옥은 '시도유형문화제 제131호(종로구)'로 등록돼 있는데요, 등록시점은 2001년 4월 6일입니다. 김병관 전 회장의 '증언'이 나온 지 5년 뒤, <동아일보> 광화문 신사옥이 건립된 지 그 이듬해의 일입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동아일보> 구사옥에 대한 설명을 살펴봤더니 <동아일보> 보도내용을 그대로 인용해두었더군요.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동아일보 사옥이다.1926년에 처음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 3층 건물이었으나 후에 고쳐 지어 지금은 지하 1층, 지상 6층 건물이다.내부는 기념관으로 사용하면서 상당 부분 본래의 모습이 없어졌으나 외부의 모습은 잘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조선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 동아일보가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해야 한다."는 동아일보 창간자인 김성수 선생의 뜻에 따라 이곳에 자리하였다. 건물이 있는 광화문 네거리는 서울의 도심부를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이며 이 건물은 1920년대 이후 급속한 도시의 변화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단 여기 만이 아닙니다. 지난 2004년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펴낸 <서울>(돌베개)이라는 책에서도 이런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심지어 개인 블로그에서도 문화재청의 설명을 그대 옮겨두었더군요. 소위 확대재생산이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다 이십년, 오십년, 아니 백년이 지나서 지금처럼 논쟁을 벌일 사람조차 다 죽고 나면 그땐 마침내 확실한 '진실'로 굳어지는 것이지요. 이래서 어떤 이들에겐 '세월이 약'이 될 수 있겠다 싶더군요.

   

"총독부 감시를 위해 인촌이 동아일보 사옥을 광화문 네거리에 세웠다"

인촌의 손자인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의 '증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증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의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 맞은편에는 <조선일보> 소유의 코리아나호텔이 있습니다.
수 년 전에 작고한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이 쓴 책에 따르면, 이 호텔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배려로 일본차관을 얻어 1971년에 준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동생인 방우영 <조선> 명예회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형님한테 들으니 청와대를 감시하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에 코리아나호텔을 세웠다더라"
만약 방우영 명예회장이 이렇게 말하고, 또 <조선일보>에서 이걸 몇 번 받아쓰면 그게 곧 '진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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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객관적인 여러 정황으로 살펴보건대,  저는 인촌이 '총독부 감시' 운운했다는 말을 진실이라고 믿기 어렵습니다. 저는 문제의 안내판을 철거하거나, 아니면 안내판의 문구를 수정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현재의 안내판을 세워두려면 <동아>는 저 같은 사람도 납들할 만한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즉, <동아일보>가 총독부를 감시한 기록이나 그 외 다른 납득할만한 자료라도 말입니다.

   
▲ 광화문 네거리에 서 있는 <조선일보> 소유의 코리아나호텔. 혹 이 호텔은 '청와대 감시'를 위해 지은 건 아닐까?(사진-코리아나호텔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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