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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영 선생은 자유와 평화, 주권의 아나키스트"
[류중혁 칼럼 ]'민족독립운동의 발자취 중국동북지역 기행'
2009년 09월 19일 (토) 11:40:58 류중혁 ryoojh123@hanmail.net

류중혁 시의원 (부천시의회 행정복지위원회)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조약으로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일제는 한국의 고위 지도층을 회유하기 위해 거액의 은사금과 귀족 작위를 제시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준 은사금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십억 원에 달하는 거액으로 대부분의 양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제에 협력했다.

하지만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1867~1932) 선생은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2월 경기도 포천 등지에 있던 1만여 석의 농지와 가옥을 처분하고 (당시의 돈으로 40만원. 현재의 환율로 환산하면 약60억 원 정도-통계청에서 환산한 값) 전 가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땅을 개간하고 독립운동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10년 동안 3000여 명의 정예 교관들을 양성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업적을 세웠다.

   
▲ 고려혁명단 (길림시 북경로 179번지, 현재 길림설계건축원건물)앞에 선 필자

지난 9월 11일부터 13일까지 2박3일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1867~1932)선생님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 중국 동북지역(만주벌판)을 기행했다.

항일무장투쟁의 지도자이자 독립의 설계자였던  이회영 선생은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일제 강점기 하에서  침탈된 국가 권력에 대해 자유와 평등, 평화,주권을 추구하며 투쟁한  당 시대의 아나키스트(anarchist) 이었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져가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이후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가 남긴 교훈을 통해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자세를 정립하기 위해 100년 전 이 땅의 애국지사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역경의  현장을 찾아가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장춘에서 시작하여 할빈까지 1297km의 기행은 "독립운동 선열들의 뜻을 기리 기위한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이희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걸(안양 만안) 국회의원과 문학진(하남) 의원을 비롯하여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교수 ,김병기(전문위원) 교수,정락경 이대목동 병원교수, 김동주 연출감독, 김정현 촬영감독, 박용진 사진작가 등 30여명이 함께 했다

   
▲ 이곳 삼원포는 이회영,이동녕,주진수, 3인이 가족을 데리고 선발대로 도착한 곳

9월 11일 첫날은 09시4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0시55분에 장춘공항에 도착하여 전용 버스 편으로 약 5시간을 달리니 유하현(柳河縣) 의 삼원포((三源浦) 에 도착하였다.

삼원포는 이회영 선생이 44세 때인 1911년 가족 이동녕, 주진수와 함께 선발대로 도착한 곳이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이회영 선생은 가족회의를 열고 6형제가 모인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망명 계획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족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한 공신의 후예라고 하는데 우리형제가 당당한 명문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여러 형님 아우들이 나의 뜻에 따라주기를 바란다"

이회영 선생의 제안에 6형제가 모두 찬성을 하여 1911년 2월초 포천등지에 있던 1만여 석의 농지와 가옥을 처분하였는데 당시의 돈으로 40만원(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약60억원정도(통계청에서 환산한 값) 으로 이곳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하여 그해 4월 삼원포 대고산에서 3백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경학사를 조직하고 사장에 이상용을 세우고 이회영 선생은 내무부장을 맡아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기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에는 이동녕이 맡았는데 이것이 신흥 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이후 1912년에는 통하현(通河縣) 합니하(蛤尼河)로 이전하였다가 1919년 4월초 한족회가 조직된 후 3.1 운동의 열기로 몰려드는 청년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유하현 고산자(지금의 추가가)로 옮기고 합니하의 무관학교는 분교로 두었다.

   
▲ 신흥무관학교 합니하

이곳 무관학교는 일본육사출신의 이청천,김광서,신팔균 등이 합류하면서 더욱 활기를 띄었지만 일제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내부의 사건(마적의 습격, 윤치국 사건)으로 폐교가 되고 말았지만 폐교될 때 까지의 신흥무관학교 의 졸업생수는 3천5백여명으로 이들이 후일 만주 독립군의 이 되어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지금의 도문시)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 전투가 바로 이회영 선생 일가가(6형제)만든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이 이룬 업적이며 이들이 광복군의 핵심 정예가 되었다.

(청산리 전투-1920년 10월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80리 계곡에서 일본군을 만난  김좌진 장군은 나중소 참모총장과 박영희 부관 이범석 연성대장 등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고동하,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차례 격전을 벌여 일본군 사상자를 3300명을 넘어서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투)

   
▲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柳河縣 三源浦)

이후 우리일행은 약 5시간에 걸쳐 독립투쟁사 강의를 들으며 길림성으로 향했다.  길림성은 1919년11월 9일 밤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한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항일 무력 독립운동단체(의열단)로써 1920년 일본고관 암살과 관공서 습격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명칭은 " '정의'의사를 맹렬히 실행한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당시 만주와 중국관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들이 운동방식이 미온적이고 온건하다고 본 의열단은 직접적 투쟁 방법인 '암살'과 '파괴','습격' 이라는 과격한 방법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 나가기로 하였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단장은 김원봉이 맡고 고문으로는 김대지, 황상규, 가 맡고, 단원으로는 윤세주,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의 13명이였다.

초기 의열단의 의거활동으로는 ▪밀양,진영 폭탄 반입사건 ▪부산경찰서 폭파사건▪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의거▪조선총독부 폭탄투척의거▪상해 황포탄 의거▪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 효제동 의거▪ 동경 니주바시 폭탄 투척사건▪동양척식 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 투척 의거 등을 들 수 있다.

의열단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신채호는 1923년 1월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의열단 선언)"에서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 걸었다.

의열단은 창단 후 근거지를 길림에서 북경으로 옮기고 상해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 여명의 단원들이 횔동을 하였다.

고려혁명단은 1926년 4월5일 길림성 성 영남반점(지금의 길림설계건축원 건물)에서 정이형을 중심으로 국내의 김봉국,이동락,이동구,송헌,러시아에 있던 이규풍,주진수,최소수,만주의 양기탁,현정경,고활신,곽종대,오동진,등이 창당하여 초기부터 무장투쟁을 위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정이형은 "정통단" 이라는 특수부대를 조직하여 길림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위장회사를 설립하여 무장활동을 전개 하면서 국내로 진입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는 한편 만주에서는 친일파 척결 및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쳤다.

   
▲ 우당 이회영 선생의 자손 이종걸 국회의원(안양 만안구)과 함께

우리 일행은 길림성의 의열단 결성지와 고려혁명당 창건지를 돌아본 뒤 흑룡강성 목단강현을 지나 해림시로 향하였다.

해림시로 향하는 버스에서 이덕일 소장님으로 부터 역사 강의를 듣는중 우리 일행은 서로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동안 조선일보에도 연재되고 책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중에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된 이론은 ▲대동강 유역은 고조선과 낙랑군 지역▲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봉건정권▲한강이북은 중국의 영토 등으로  졸본성(지금의 한인현)에서 고구려를 창건한 주몽왕의 업적과 국내성(지금의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 비 등이 만주일대가 고구려 땅 이었다는 걸 확실히 증명해 주고 있는데도 현재 한국사학계가 일본 식민사학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관계로 동북공정의 논리는 우리 스스로가 중국에게 준 꼴이 되여 버렸다는 것이다.

이덕일 교수는 "더군다나 일본의 역사 외곡에 맞서 정부지원 프로젝트였던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까지 일제식민사학의 주장이 고스란히 실려있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이교수는 "지금까지 국사교과서는 독립운동(무장투쟁사)보다 일제 식민지체재내의 애국계몽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 등을 위주로 서술해 오고 있지 역사적 진실에 대한 설명은 없는 것도 큰 문제"로 지적했다.

현행 고등학교 국사교과서(121쪽)에는 항일 독립무장투쟁의 중심조직이였던 3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에 대해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이동하여 각 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여 참의부, 정의부,신민부의 3부를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참의부는 임시정부가 직할하였다"라고 서술한 것이 전부이다. 학생들은 삼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가 무슨 활동을 했는지도 모른 채 이름 외우기에 바쁠 뿐인 반면, 같은 국사교과서는 일제 때 큰 발전을 이룬 것처럼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교과서 242쪽을 거론했다."일제 강점기에 인구는 늘어갔다. 인구조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10년대 말에 국내거주 한국인은 1700만명 정도에서 1930년대에는 2000만명,1942년대에는 2600만명으로 늘어갔다.서울(경성)의 인구는 1920년에 24만명에서 1940년에는 93만명으로 4배가늘었다 는 등 또한 "총독부는 서울에 도시개수계획을 도입하여 도시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며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덕분에 인구가 늘고 서울이 근대도시로 탈 바꿈했다"

또 243쪽에는 "1920년대 지어진 개량한옥은 사랑방과 문간방이 없어지고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니스와 페인트를 칠한 혼합형 가옥이고,1930년대에는 2층 양옥으로 전에 없던 복도와 응접실 ,침실, 아이들 방" 등으로 기록이 되여 있다는 이덕일 소장의 강의를 들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를 쓰신 이종걸 국회의원의 할아버지이신 이회영 선생님과 바로 동생인 이시영(초대 부통령) 같은 휼륭한 독립투사들이 너무나 묻혀 버렸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우리들의 이 기행이 너무나도 뜻 깊고 갚진 교육현장에 온 것을 보람으로 느꼈다.

우리 일행을 실은 버스는 목단강을 지나 김좌진장군의 암살 현장인 해림시에 도착하였다.

   
▲ 김좌진 장군 기념비 앞에서
해림시에는 백야 김좌진(1889.11.24~ 1930.1.24) 장군이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치시다가 1930년 1월20일 중동철도선산시역(지금의 해림시) 부근에서 박상실의 저격을 받았으며, 배후 인물로는 김봉환(일명;김일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화요파 공산당원인 이복림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와 우당선생의 손자인 이종걸 의원과 함께 한 2박3일간의 빡빡한 일정 중 이종걸 국회 의원은 대련시의 여순감옥과 북경에서의 독립투쟁사를 돌아보기 위해 우리 일행과 헤어졌다.

이회영 선생은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조선 명문가 백사 이항복 11세손이다.

영의정만 9명을 배출한  조선시대 명문가문인 이회영 선생의 부친은 이조판서, 당숙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동생 이시영은 평안남도 관찰사와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지낸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다.

이회영 선생은 구한말 독립운동가로 안창호 이동녕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했고 신채호와 임시정부 단합을 위해 조정역을 담당했다. 또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에서 친일파가 아닌 독립투사와 그들의 후손들이 대접 받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하면서 우당(이회영)선생의 기행문을 마친다.

   
▲ 우당 이회영 선생 추모기행에 함께 해 주신 문학진 국회의원은 워낙 바뿐 일정을 소화해 내느라 우리 일행과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강행군을 했지만 마지막 기행지인 할빈공항에서 함께 기념 촬영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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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선생(우당 기념관)

이곳 삼원포는 이회영,이동녕,주진수, 3인이 가족을 데리고 선발대로 도착한 곳

우당 이회영 선생의 자손 이종걸 국회의원(안양 만안구)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합니하

우당 이회영 선생 추모기행에 함께 해 주신 문학진 국회의원은 워낙 바뿐 일정을 소화해 내느라 우리 일행과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강행군을 했지만 마지막 기행지인 할빈공항에서 함께 기념 촬영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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