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화된 동백 ⓒ2004 김민수

음력으로 치면 지난해부터 올해 첫날인 설날에 이르기까지 2년에 걸쳐 눈이 내렸습니다. 제주의 평지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있는 일이라 색다른 풍경을 볼 수 있기도 했지만 세찬 겨울 바람과 기습적인 한파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 가니 행여나 다른 큰 피해들은 없는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제 친구들이자 스승이기도 한 꽃들과 나무들이 밤새 추위에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설날 아침, 하얀 눈이 쌓인 뜰에 섰습니다.

붉은 피를 토하듯 동백이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그 시커먼 가슴을 대변하듯 검게 타들어 가는 이파리는 참으로 아릿함을 전해 줍니다.

▲ 사철나무 ⓒ2004 김민수

늘푸른 사철나무의 이파리에도 송글송글 눈이 쌓였습니다. 아주 예쁜 소품마냥 이파리들 하나마다에 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은 이파리들만큼의 꿈들을 가득히 피어내는 날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꿈. 그것을 이뤄가기 위해서 때로는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아픔같은 것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마치 이렇게 추운 겨울날 하얀 눈을 담고 있는 사철나무가 보여주는 아름다움 같은 것은 아닐런지요.

▲ 갯쑥부쟁이 ⓒ2004 김민수

갯쑥부쟁이도 갑자기 내린 눈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지난 가을부터 피어나 올 겨울을 나고 봄에게 바통을 이어주리라 생각했던 꿈이 어쩌면 이번 한파로 부질없이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겨울은 쉬는 계절, 갯쑥부쟁이의 계절은 아니니 "이젠 좀 쉬렴!"하고 말을 건냅니다.

쉴 때, 물러날 때를 아는 삶,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합니다. 자연은 간혹 자신의 때를 잊고 피어나도 앙증맞기만 한데 유일하게 사람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 감국 ⓒ2004 김민수

감국 역시도 가을꽃이죠. 이제 몇 송이 남지 않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소담스럽게 내린 눈을 한번쯤이라도 보고 싶어서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항상 그윽한 향기를 품고 눈을 맞춰주던 감국, 이제 저 눈이 녹고 추위가 풀리면 얼었던 몸이 사그러 들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슬프지 않은 것은 끝이 아니라 쉼의 시작이요, 올 가을에 더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니까 그렇습니다. 기쁨을 위한 아주 잠시의 이별입니다.

▲ 백량금 ⓒ2004 김민수

이미 오래 전부터 붉은 빛으로 익었던 백량금도 이런 모습으로 자신을 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화분에 심겨져 있는 백량금을 볼 때마다 어느 사진첩에서 보았던 눈을 이고 있던 백량금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제주 평지에서 그것은 언감생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에게도 아주 잠시지만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아주 다양한 색감을 담고 있습니다. 하양과 붉게 타오르는 빨강, 그리고 갈색과 초록…. 겨울에도 이렇게 다양한 색감들을 품고 있는 백량금처럼 고난의 시간에도 늘 아름다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러나 너무도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그윽한 향기로 겨울을 향기롭게 가꾸어가던 수선화였는데 그 얇은 꽃잎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꽁꽁 얼어버렸습니다. 줄기까지도 얼어버렸습니다.

▲ 수선화-줄기까지 얼어버렸습니다

이제 저 꽃은 눈이 녹으면 함께 녹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 깊은 눈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들은 이번 고난을 거울 삼아 더 강인한 모습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그만큼 더 깊은 향을 가지고 피어날 것입니다.

그래도 마음이 아픕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와 눈맞춤을 하고 인사를 나누던 꽃이었는데….

▲ 섬꿩고사리 ⓒ2004 김민수

돌담에 자리잡고 푸른빛으로 사철을 나는 섬꿩고사리도 이번엔 좀 놀란 듯합니다.

"내 살다가 이런 눈과 추위는 첨이다."

그러면서도 오랜만에 맞이하는 눈을 가득하게 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역시도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모두가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모습, 어떤 것들끼리 함께 놓아도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자연인가 봅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니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늘 티격태격 싸우고 살고, 삶을 조화가 아닌 투쟁 일변도로 생각하는 우리네 삶이 부끄럽습니다.

 담쟁이덩굴, 그리고 제주의 돌담입니다. 제주는 눈이 오면 옆으로 붙죠. 바람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데 그래야 저렇게 제주의 돌담을 든든하게 해주는 덩굴도 목마른 목을 축일 수 있겠죠?

설날 아침.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찡한 풍경으로 열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김민수 기자는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실리지 않는 그의 글은 <강바람의 글모음>www.freechal.com/gangdoll을 방문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