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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봉준과 체게바라의 제사를 모시냐고요?
[인터뷰] 장효문 시인 "삶의 질량만큼 문학을 써야 한다"
2004년 01월 20일 (화) 00:00:00 김성철 기자 iegux@naver.com

부천타임즈 전남동부 : 김성철기자

시를 칼에다 써야 한다고 소리치던
어느 시인의 말을 듣고 난 뒤부터
나는 한동안 칼에 대한 역동적 사고에 빠져
밤이 되면 머리 위에 여러개의 칼을 놓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날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내 사고의 대상으로만 바라 볼 뿐
일어날 줄 모르는 내 비열한 사고력 때문에
나는 끝내 칼을 잡지 못했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밤은 칼에 대한 예지
내가 책에서 선생님에게 배운 칼에 관한
재질 용도 효과 정당성에 대한 지식을 비웃으며
칼은 밤이나 낮이나 분탕질을 하며 날아 다녔다.

나는 시를 총알에다 쓰고 싶다
칼보다 강한 총알이 되고 싶다
예리하고 눈부셔 오색빛 찬란한
총알이 되고 싶다
날아 가고 싶다 지금 바로.

<시를 위한 신소재>(장효문 작)

   
▲ 체 게바라 초상화를 가슴에 부착하고 다니는 장효문 시인 ⓒ2004 김성철

 장효문 시인에 대해 소설가 한승원은 "의혈과 열혈이 여전한 생명력을 지닌 시인"이라 했고, 김준태 시인은 "녹두장군 전봉준과 영락없이 얼굴이 비슷한 대륙적 골격의 시인"이라고 말한다.

가슴에는 항상 혁명의 불을 지피려고 체 게바라 초상화 상표가 붙은 옷만 입고 다닌다.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도안을 하고, 제작은 세탁소에 맡기기 때문에 시중에서 살 수 없는 제품이다.

체 게바라 상표가 붙어있는 옷을 장롱에서 꺼내 자세한 설명을 하면서 "우리 집사람이 이런 나를 보고 어린애 같다고 말한다"며 환하게 웃는다.

이번 민족문제연구소-오마이뉴스의 '친일인명사전' 네티즌 성금모금에 대해서도 "나치 협력자들도 모두 처벌을 받았으니, 이번 기회에 친일세력들도 청산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효문 시인은 미당 서정주 시인이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스승이 친일행각 한 사실 때문에 매도당하면서 방황했던 지난날을 보상받고 싶어한다.

다음은 장효문 시인과의 인터뷰 내용.

-작년에 타계한 소설가 이문구 선생님과 만남은 어땠나요?
"당시 미아리에 있던 서라벌 예술대학 1학년 때 그를 처음 만났어요. 처음 본 순간 후덕하고 심성이 곱게 보였죠. 나는 시를 쓰고, 문구와 한승원이는 소설을 썼지, 우리 셋은 촌놈이라 그런지 서로 친하게 지냈어요.

문구는 요즈음 말로 말하면 괴짜였죠. 옷 한 벌로 대학을 졸업했을 저도였으니까. 방송에 출연한다고 해서 양복을 빌려줬는데 몸에 맞지도 않는 양복을 입고 가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한참을 놀렸어요.

첫 시집 '들쥐떼들의 울음'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 문구와 승원이가 녹동까지 찾아와 밤새도록 술 마시다가 주민들과 시비가 붙어 싸운 적도 있어요.

문구는 김동리 선생님 추천에 의해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죠. 그 분의 친일행각이 드러났을 때, 스승에 대한 모든 비난과 비평을 감내할 뿐만 아니라, 초지일관 순수문학만을 고집한 선비기질을 타고났어요.

그와 달리 나는 74년 미당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시문학지에 '바람과 권력'으로 문단에 등단했지만, 스승의 방패막이 되지 못했어요."

   
▲ 서재 액자에 걸려있는 체 게바라 초상화 ⓒ2004 김성철

 -서정주 시인에 대한 일화가 있다면.
"습작 시 실기시간에 시를 발표하면 미당 선생님이 유독 저만 칭찬했어요. 박목월, 김구용 선생님이 계셨지만, 똑같은 시를 박목월 선생님에게 갖다 드리면 '이게 시냐고' 면박을 주는데, 미당 선생님은 '시를 잘 썼다'라고 항상 칭찬하니 당연히 미당 선생님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죠.

칭찬을 듣다보면 시가 만만하게 보이고 내 스스로가 자만에 빠져 창작활동이 게을러지다 보니 10여년 동안 허송세월만 보냈어요.

서울 봉덕동에 사실 때, 집에 찾아가면 거실입구 쪽에 항상 국화꽃이 피어 국화향기가 집안 가득 넘쳐나요. 정종을 마시다가 어느 정도 취하면 제 귀를 사정없이 잡아당겨요. 얼마나 아픈지 화장실 가서 몇 번 울었어요. 제자를 사랑하는 표현이 유독 남달랐어요.

한번은 저에게 '너 호가 없으면 조운제(영문학박사)에게 주려고 했던 메주가 어떻겠냐' 물어서 콩메주는 안 한다고 했더니, 웃으시며 청라(靑羅)라고 지어 주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메주는 콩메주가 아니라 매주(梅株)로서 오래된 고목에서 매화꽃이 피어난다는 뜻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호를 버린 게 아쉬워요."

-서정주 시인의 제자로서 아픔은 없었는지.
"미당 선생님 친일관련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고, 80년 전두환 군부독재자를 칭송한 시를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그 분의 제자라는 사실이 너무 비참하고 참담해서 내 기억 속에서 모든 걸 다 지워버려야만 했던 망각의 세월들이 있었죠.

광주에 친한 문인들이 많아요. 송기숙, 문병란, 문순태, 송수권, 김준태, 이런 문인들이 저와 만날 때 미당 선생님의 친일행각을 물으면 저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어요. 문학강연회를 가도 똑같은 질문만 되풀이하니 죄의식도 없는데 화가 날 때가 많았어요.

미당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너무 괴로워서 문상도 가지 않고 욕을 하며 울었어요. 장례식이 끝난 후, 부인과 함께 제사상을 준비해서 고창에 안장된 묘를 찾아 제를 올리고 나니, 어느덧 동천에 별이랑 달이 떠있고 어스름한 저녁노을 사이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이 보여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미당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저에게 '동천' 시를 선물해 주고 간 거죠. 그 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초창기 시와 70년대 이후 시의 변화가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학창시절부터 T.S. 엘리어트 작품들을 좋아했고 유독 '황무지' '4중주'를 즐겨 읽었는데, 이런 작품들을 연구하다보니, 그 심오한 뜻과 깊이를 이해하려면 로마신화와 성경을 모르고서는 접근이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나중에 현실참여와 시를 결합시키기 위해 가톨릭에 귀의했죠.

이때 윤공희 주교, 함세웅 신부, 김성룡 신부님을 만나 나의 위선과 거짓을 고하고, 본명 시몬 베드로가 되었죠. '성경말씀을 통해 사람이 되었다' 라는 믿음과 확신을 갖으면서부터 나의 삶이 새로워 졌고 시를 통해 민족성과 역사성을 일깨웠어요.

그 후 까리타스 수녀회에서 발행하는 생활성서 잡지에 군부독재에 항거한 '찬란한 빛의 축제' 시를 연재했고, 이어 민중의 혁명을 낳고자 '서사시 전봉준'을 집필했어요.

계속해서 스무 해 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전봉준을 찾아다니면서, 생성의 근원인 사랑, 그 사랑의 실체를 확인하려고 시집 '우리 바람이 되어'이어 '사랑아 내 사랑아'를 발표했죠."

-시집 '사랑아 내 사랑아'에 보면 사랑하는 후배 시인들이 나오는데.
"내가 사랑하는 후배 중에 김남주와 지리산 등반도중 변을 당한 고정희를 잊을 수가 없어요.

고정희는 지리산 취재한다고 그날 전화가 왔어요, 그런데 얼마 있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거예요. 믿어지지가 않고 허망하더라고, 출상하던 날 관을 붙들어 잡고 얼마나 목놓아 울었던지.

남주는 석방하고 얼마 후에 나와 함께 여관방에서 자는데 복통을 호소하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아 보라고 했더니 결과가 췌장암 말기증세라는 거야. 그 때 유언처럼 남긴 말이 '삶의 질량만큼 문학을 써야 한다'라는 거야. 그래서 시 제목 '일기'를 통해 김남주가 이루지 못한 혁명을 노래했지."

-시작(詩作) 활동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유신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을 획책하여, 이를 반대하는 시를 발표했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어요.

한번은 집으로 밤중에 잘 아는 제자가 찾아와 사진이 붙어있는 '인사기록카드'를 펼쳐 보이면서 자필서명을 요구해왔어요. 면전에다 스승을 팔아먹는 놈이라고 호통을 쳤더니, 무릎꿇고 빌면서 서명을 받지 못하면 바로 직위해제가 된다고 통사정을 하는 바람에, 하도 측은하여 서명을 해 줬더니, 그 후부터 2∼3명의 담당형사들이 내 주변에 고정적으로 배치되어 집필 활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요.

'신의 눈물' 출판기념회 때도 참석하실 분들이 도착할 시간이 되었는데 오지 않아서, 나중에 알아보았더니 홍남순 변호사, 고은 시인, 송기숙 교수 일행이 광주에서 녹동으로 오다가 탄포검문소에서 형사들에게 모두 연행되어 광주로 이송한 사건이 있었죠."

   
▲ '서사시 전봉준' 시집 ⓒ2004 김성철

 -역작 '서사시 전봉준'을 집필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보안감찰과 탄압을 피해 절간을 전전하다가, 76년 광주에서 한승원을 만나, 박정희 군부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시와 소설을 집필하기로 약속하고 정읍으로 함께 떠나기로 했어요.

그날 밤에 한승원이는 몸살을 앓고 누워버려, 내 혼자서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고 정읍으로 향했죠. 그때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서사시 전봉준'은 기필코 완성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했죠.

'서사시 전봉준' 장편 서사시가 나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5년간 전봉준 생가와 격전지를 수십 차례 답사하였고 살아있는 분들을 만나 구술을 정리하거나 사진자료를 정리할 때는 고충도 많았어요. 특히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내 평생 마지막 남을 유작이라 생각하고 집필했어요.

십년을 넘게 고된 습작기를 거쳐오면서, 문학자로서 역사적인 사실을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바로 "서사시 전봉준' 입니다."

-'서사시 전봉준' 이후에 나온 작품들이 있다면.
"'서사시 전봉준'은 원고로 따지면 2천매가 넘는 장시인데도 미흡하고 부족한 점이 많았어요. 그래서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식 때 동학농민혁명의 모든 것을 집대성 한 '판소리 전봉준'을 발표했죠.

   
▲ '판소리 정봉준' 책 ⓒ2004 김성철

 다섯마당 중에 첫째대목은 고부성의 함성, 둘째 대목은 일어나면 백산 앉으면 죽산, 셋째대목은 전주성의 무혈입성, 넷째 대목은 우금치여 말하라, 다섯대목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로 끝이 나요.

'판소리 전봉준' 다섯 대목을 전남대 전임삼 교수가 판소리로 부르는데 아직까지는 대중성이 없어요."

-서재 벽면에 온통 전봉준, 체 게바라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무슨 이유라도.
"내가 집에서 세분의 제사를 모셔요. 막내 작은아버지가 여·순사건 때 14연대 취사병으로 입대했다가 아무 영문도 모르고 빨치산으로 몰려 지리산에 있는 청학동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한 날짜가 3월 3일이에요. 내 작품 중 '은어'에 보면 막내 작은아버지에 관한 얘기들이 수록되어 있어요.

3월 21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가로 손꼽히는 전봉준, 나이 마흔 한 살에 효수형을 당하면서도 '네 이놈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 거리에서 내 목을 베어서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옳다'고 호통을 치며 눈을 감은 이날에 제사를 모셔요.

덧붙이는 글: 위 기사는 부천타임즈와 오마이뉴스에 동시게재하였습니다.

장효문 시인은...  
 청라(靑羅) 장효문 시인은 1940년 고흥군 도양읍 용정 출생. 순천고 광주고를 거쳐 61년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했다. 74년 시문학지에 '화실과 새' '바람과 권력'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1시집 '들쥐떼들의 울음'(한국문학사 1975) 2시집 '서사시 전봉준'(전예원 1982) 3시집 '아버지 저기 무지개가 보입니다' (동천사 1985) 4시집 '신의 눈물' 5시집 '우리 바람이 되어'(눈 1991) 6시집 '판소리 전봉준'(자유세계 1993) 7시집 '사랑아 내 사랑아'(시와 사랑 1998) 등이 출간됐다.

'목요시' '원탁시' 동인이며 광주·전남 민족작가협의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현재 고흥여자고등학교 재직 중이다. / 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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