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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의 '詩의 숲을 거닐다'
2007년 09월 27일 (목) 00:00:00 유재근 시민기자 jku810@naver.com

부천타임즈: 유재근 시민기자

추석 연휴가 막 끝난 9월 27일(목) 부천 복사골 문화센타에서 천양희 시인(1942년생 부산출생)이 '시의 숲을 거닐다'라는 제하로 강연이 있었다. 그 녀의 대표 시로는 '단추를 채우며', '오래 된 골목' 등이 있다.

천 시인은 시에 대하여 '무엇을 쓸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쓸 것인가'가 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를 하면서 시의 전제로 '경험', '상상력', '새로운 인식이나 발견'이 제일 중요하며, 자기만의 체험이 시의 씨앗이 되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를 한다.

상상력을 중심으로 한 자기만의 체험이 바탕이 되지만 다른 이의 경험을 잘 융합을 시켜야 참시로서의 탄생이 가능한 것이며 시는 누구나 쓸 수는 있지만은 어떻게 잘 쓰느냐가 중요다고 역설을 한다.

문학은 주로 상상력이 바탕이 되고 철학의 주체는 이성이지만 시의 생명은 적절한 긴장과 절제가 필요하며 만약 절제가 되지 않으면 시에 생동감을 잃어 중언부언으로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독자가 도모지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해가 지면 노을을 볼 수가 없어 노을에 대한 그리움이 많은 반면에 스웨덴에서는 성에 대하여는 상당히 자유로우므로 이성에 대한 갈등도 존재하지를 않고 연애사건도 이슈화되지 않는다.

우리가 연을 날리려면 우선은 연을 잘 만들어야 하며 연을 높이 공중에 뜨게 하기 위해서 얼레로 연줄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풀었다 하는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시를 쓰는 데에도 얼레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손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래는 거문고를 가르치는 어느 스승과 제자의 문답이다. '거문고 줄을 세게 당기면 어찌 되는가?'라는 스승의 질문에 제자는 '줄이 끊어 집니다.'라고 대답을 하였고 '거문고 줄을 느슨하게 당기면 어떤가?'라는 질문에는 '흥이 나지를 않습니다.'라고 답변을 하였다고 한다.

위에서처럼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긴장과 절제' 된 시를 써야 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시에 사용되는 동사나 형용사에 대하여는 적절한 선택이 필요하겠으나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아무런 말이나 선택을 하여서는 안 되고 시인은 끊임없이 새 언어의 탐구자가 되어야 하며 오류를 범해서도 결코 안 된다.

가령 '가을에 떨어지는 떡갈 잎'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면 사실에 입각한 잘 만들어진 시가 아닌지라 결코 독자의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왜냐 하면 떡갈 나뭇잎은 겨울에도 말라 비틀어진 채 달라붙어 있다가 새 순이 나올 때 밀려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천 시인은 현재 컴퓨터 대신에 아직도 원고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원고지의 사각형을 보노라면 절벽처럼 느껴져서 어떻게든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다 보니 백지의 공포를 느낀다고 하였다.

심지어 잘못된 시를 발표하고 나서는 공포를 느끼면서 살고 싶지 않다는 감정까지 몰입된다고 까지 고백을 하였다.

시를 조급하게 완성시키려 하면 졸시가 되기 쉬우므로 시를 쓰는 것은 비행기나 차로의 이동이 아닌 한걸 한걸음의 발걸음인 과정으로 이는 마치 임산부가 10개월 만에 산고를 느끼면서 한 생명을 잉태시키는 과정과 똑같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이나 고난을 겪지 않고는 좋은 시의 탄생을 기대할 수가 없으며 시에서도 기초가 제일 중요하다 할 것이다. 글을 쓰는 기초로서는 다독, 다작, 다상량으로 시는 사색(思索)이 창조하는 깊은 샘과 같다. 그러므로 사색으로 내 마음의 새소리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다독을 하면 많은 지식도 얻을 수 있는 반면에 간접경험을 할 수가 있고 이것이 글을 쓸 수 있는 모티브로도 작용을 한다. 물론 때로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도 시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지만 시는 전통 위에 머물러야 한다. 이는 타향이 아무리 좋아도 고향을 기초로 작용한 감정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축에서 일층이 제대로 축조되지 않고는 이층을 올릴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중요하며 보는 시각에 따라 새로운 것이 보이기도 한다. 어느 작가는 물을 보고 '수평선'을 느끼기도 하지만 다른 작가는 '누워있기 지루하여 벌떡 일어선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내가 볼 수가 있어야 한다.

이러려면 관습적 인식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인식과 발견을 할 수 있어야 좋은 시가 될 수가 있다.

친구, 연인, 부부 등에서 때로 부부를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실제는 이심이체이며 부부간이나 부자간에도 소유욕을 버리고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 제대로 잘 볼 수가 있다.

추상적인 시는 뜬 구름과 같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때로 종언부언을 하기도 하는데 시는 절망과 희망의 경계선에서 만이 시의 꽃을 피울 수가 있는 것이다.

시는 되새김질과 갔으되 지루한 반복이 되어서는 안 되며 낯선 세계로 바꾸려는 끊임없는 긴장과 자각만이 문인의 자세라 할 것이다.

시는 자기를 끊임없이 절단시키는 과정으로 이는 명창이 자기 목청을 절단 내어 득음하는 과정과도 같다 할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순정을 바쳐 써야 하므로 몸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나 긴장을 필요로 한다.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면 절대 시가 되지를 않으며 빨리 취하게 하는 술 등 시를 흉내 내고자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잘 쓴 시일지라도 가슴이 아닌 머리로 시를 쓰면 정성이 보이지를 않아 감동이 일지 않으며 늘 시와 함께 살며 생활을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시를 쓰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글귀가 귀에서 맴돌 정도로 시가 생활화 되어야 하며 적어도 남의 시는 한번으로 일고 끝나지 말고 두번 이상을 읽어야 한다. 남이 잘 쓴 시를 따라 모방을 하여도 안 되고 비록 상당히 서툴더라도 내 말, 내 소리, 내 세계를 담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를 일반적으로 좋은 시와 빈약한 시로 구분하는데 그보다는 살아 있는 시와 죽은 시로 구분을 시키는 것이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 올 듯 싶다.

살아 있는 시라면 영혼을 채우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면서 체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곱씹게 하며 기억에 남으면서 시어에 생동감이 있고 자기만의 개성이 잘 나타난 시를 꼽을 수 있으며, 반대로 죽은 시로는 남의 시를 흉내 냈거나 상투적인 표현으로 식상한 시들을 손꼽을 수가 있을 것이다.

괴테는 시를 최고의 표현으로 현실성이 경합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새로운 자신의 영혼 발견으로 이로 말미암아 남을 구혼하고 자신도 구혼을 받을 수 있어야 좋은 시라 하였다.

이런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집안에 처박혀 있으면 구할 수가 없고 오로지 새로운 세계를 발견코자 하면서 절대적 자아를 찾아 밖으로 나서 관찰하면서 시의 영감을 구하려는 삶의 태도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궁극적으로 시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 독자로부터 더욱 공감을 얻어 낼 수가 있고 훨씬 더 좋은 시로 대접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비근한 예로 독수리는 40세 정도를 살게 되면 앞으로 30년을 더 살아 70세까지 살 것인가 아니면 1년만 더 살다가 생을 맞을 것인가를 결정하여야 한다.

40년을 산 독수리는 앞으로 30년을 더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리를 바위에 부딪쳐 절단시켜야만 새부리가 돋게 되며 새로 생긴 부리로 자신의 발톱마저 뽑아 버려야 새 발톱이 돋아나면서 향후 30년 더 살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두려워하는 독수리는 부리와 발톱이 연화되어 약 1년 정도만 더 살고는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도 이와 같이 온몸을 던져 다시 태어나야 훌륭한 시로 태동될 수가 있으며 정치를 비롯한 모든 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의 창조적 파괴를 필요로 하고 있다.

'예루다'라는 시인은 7,000여 편의 시를 쓴 중에 사랑에 관한 시는 불과 몇 편에 불과 함에도 보는 이에 따라 '사랑의 시인'으로 알려졌으며, 1940년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당시에 엘리야라는 시인이 '자유'라는 시로 '그 한 마디 힘으로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로 이어지는 비행기 삐라로 뿌린 전단은 '조국의 해방'을 노래 한 것으로 프랑스 국민들에게 읽혀졌지만 기실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시 창작으로 밝혀진바 있다.

만약 나에게 '왜 시를 쓰는가?'를 묻는다면 '잘 살기 위해서'라는 답변을 줄 것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잘 살아야 나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벌새는 하루에 90 번이나 제 몸을 치면서 70만 번의 날갯짓으로 세상을 날지만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내 몸을 치는 아픔을 느끼면서 시를 쓰는가에 대하여 깊이 반성해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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